위대한 왕 아모르문디 세계문학 4
니콜라이 바이코프 지음, 김소라 옮김, 서경식 발문 / 아모르문디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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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서경식 선생이 발표한 책에 실린 탓이다. 물론, 서경식 선생의 책은 읽어 보진 못했지만 그런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독서열을 불태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헌책방을 수소문해서 2007년에 초판으로 나온 책을 구해 읽었는데 역시나 기대이상이었다. 이 책은 1938년에 나온 프랑스 번역판을 저본으로 했다고 하는데, 작가 니콜라이 바이코프의 삶 역시 소설에 등장한 만주 호랑이 ‘위대한 왕’만큼이나 파란만장하지 않았나 싶다.

 

러시아 제국 군인으로 출발해서, 만주 일대에 근무하는 동안 아마 저자 니콜라이 바이코프는 만주 호랑이(혹은 한국 호랑이)를 비롯한 만주와 아무르 일대의 동물들을 관찰할 충분한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작가가 직접 그렸다는 38점의 삽화나 소설에 기술된 세세한 부분들은 작가의 상상만으로는 도저히 재현 불가능한 생생함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동전과 탄피를 이용한 목걸이를 만드는 것처럼, 니콜라이 바이코프는 대신 이렇게 멋진 소설을 쓰기 위한 자전 준비를 했던 모양이다.

 

여느 인간이 등장하는 성장 소설에 나오는 피조물들이 그렇듯, <위대한 왕>의 주인공 왕 역시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 태고적 원시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타투딩즈 숲에 새끼를 밴 어미 호랑이가 등장한다. 맹수들의 밤에 짝짓기를 한 어미 호랑이는 새끼를 낳기 위해 바위굴을 샅샅이 조사하고 가장 안전한 서식지를 골라 왕과 여동생을 낳는데 성공한다. 한 순간의 방심이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미 호랑이는 잘 알고 있다.

 

어미 호랑이가 타이가에서 사는 방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은 태초 이래 원시의 법칙을 그대로 따른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늑대가 숲을 울창하게 만든다는 글을 인상적으로 봤던 기억이 났다. 사람들은 포악한 늑대 무리가 인간과 숲에 위협이라고 생각하고 마구잡이로 사냥을 해서 늑대의 개체수를 줄이는데 성공했지만, 에코 시스템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늑대가 사라지자 사슴을 비롯한 초식동물들이 급작스럽게 증가하면서 개울과 어린 나무들이 자랄 수 있는 여건이 없어지자 숲이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만주 타이가에 사는 최고의 포식자 호랑이도 아마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어린 왕은 어미가 가르쳐 주는 대로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점차 장차 타이가의 군주가 될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니콜라이 바이코프는 비단 주인공 호랑이에게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역시 타이가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검은담비와 하렘을 이끄는 늙은 사슴을 비롯해서, 모든 포식자들이 노리는 멧돼지 무리의 리더 ‘갈라진 귀’도 빼놓지 않고 차분하게 기술한다. 특히 멧돼지고기야말로 포식자의 별미라고 했던가. 누구나 좋아하는 먹잇감이 되어 잠시도 쉴 새 없이 이동해야 하는 피식자의 가련한 운명을 대표하는 선수로 당당하게 한몫을 차지한다. 물론, 작가의 관찰에는 인간의 무리도 빠질 수 없다. 훗날 왕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하게 되는 타이가의 모피사냥꾼 인간들에게 왕은 그들을 수호하는 정령으로까지 받들어진다. 작가가 조심스럽게 배치한 타이가의 모든 법칙을 수용하는 퉁리 노인은 어쩌면 우리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모범적인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본 서구인의 시선이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놀라웠다. 반대로 왕/자연을 단순한 사냥감으로 보고 도전한 무분별한 러시아 군인들의 최후는 그렇기 때문에 더 비참하게 다가왔다.

 

소설의 하이라이트는 타이가에서 가장 사나운 맹수인 왕과 곰의 사투가 아니었을까. 니콜라이 바이코프는 최근 인간세계에서 유행인 격투기를 연상시키는 세밀하면서도 정교한 방식으로 왕과 곰의 사투를 치밀하게 묘사한다. 깊은 타이가 숲의 침묵 속에는 그렇게 삶과 죽음이 오가는 치열함이 곳곳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수다쟁이 까치와 어치는 그런 이야기들을 부지런히 물어 나르며 숲의 곳곳에 정보를 전달한다. 한편, 왕이 처음으로 만나 짝짓기를 한 아무르 암호랑이의 비참한 죽음은 온갖 자원이 넘쳐흐르는 만주 지방을 차지하기 위해 충돌한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 열강의 치열한 각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무진장으로 펼쳐진 산림자원을 채취하기 위해 철도가 놓여지고, 인간들이 마구잡이로 숲을 파괴하기 시작하면서 숲에 평화롭게 지내던 동물들 역시 보금자리를 잃고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할 운명을 맞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총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없다면 자신의 안위조차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해왔던 인간들이 어느새 무리를 지어, 왕에게 대항하기 시작하는 장면은 유사 이래 인류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으로 자연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퉁리 영감 같이 왕을 존경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을 아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 인간들은 자연을 정복하고, 편리를 위해 개발해야 한다는 사고에 젖어 어쩌면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멸망으로 인도할 지도 모르는 길에 들어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상념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쫓아다녔다.

 

걸출한 호랑이 왕의 모험담으로 가득한 이야기로 읽어도 좋고, 19세기말 제국주의 각축전으로 축약판으로, 그리고 인간에 대한 대자연의 경고로 접해도 좋을 <위대한 왕>을 읽으면서 오래전 이방인으로 눈으로 본 만주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착시에 빠지기도 했다. 간만에 느낀 강렬한 독서 체험이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리딩데이트] 2015년 9월 5일 토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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