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식스 카운티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제프 르미어 글 그림,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어느 신문 기사의 추천을 보고 지난 주에 읽게 됐다. 그런데 책의 실물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그냥 그런 그래픽 노블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너스 자료까지 해서 자그마치 500쪽이 넘는 분량의 대작이었다. <농장 이야기>, <유령 이야기> 그리고 <시골 간호사>라는 기본 세 가지 스토리라인에 그래픽 노블의 번외편에 해당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더해 모두 5개의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건 마치 대하소설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모두 과거와 현재를 매개로 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나처럼 좀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먼저 책의 447페이지에 나온 가계도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제프 르미어 작가의 의도대로 순서대로 읽으면서 등장인물을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래픽 노블은 어머니 클레어가 죽은 뒤, 켄 삼촌의 농장에 얹혀사는 레스터 파피노의 상상으로 시작된다. 문득 왜 <에식스 카운티>에 나오는 이들은 하나 같이 상처 입은 영혼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레스터는 병상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우리 영웅’이라는 말에 슈퍼히어로 코스튬을 포기하지 못한다. 죽어가는 누이동생이 유언으로 부탁한 레스터를 돌봐 달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한 삼촌 케니 역시 마찬가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달리고 있는 레스터를 다룰 줄 몰라 쩔쩔 매는 중년 남자의 고민이 그대로 묻어 있다.

 

그리고 한 세대를 뛰어 넘어 <유령 이야기>에서 비로소 그들 삶의 비밀이 조근조근하게 소개된다. 아이스하키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스하키에 대한 캐나다 사람들의 사랑이 바로 루와 빈스 르뵈프 형제 간의 이야기에서 재현(representation)된다. 후기에서 제프 르미어 작가가 썼듯이 형제애, 배신 그리고 아이스하키가 루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두 번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소재다. 한 때 도시에서 날리던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루와 빈스 형제의 부침을 제프 르미어는 잔잔하게 그려냈다. 그들은 한때 죽고 못 살 정도로 우애가 깊은 형제였지만 루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형제간에 의절하고 사반세기를 떨어져 지냈게 되었다. 촉망 받는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빈스는 고향 에식스 카운티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루는 부상으로 아이스하키에서 은퇴하고 전차 기사로 살아왔다. 다시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끔찍한 교통사고였다(삶의 반전을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을 교통사고라는 클리셰이로 처리한 것이 좀 아쉬웠다).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동생 빈스와 조카 손주 지미를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루. 르뵈프 형제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어떤 의미에서 가족은 세상의 풍파를 헤쳐가게 만들어주는 울타리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애증이 교차하는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시골 간호사>에서는 독자는 몰랐지만, <에식스 카운티>의 병들었거나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지킨 시골 간호사 앤 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간호사 앤은 루 르뵈프를 돌보고 있으며, 그의 조카 손주 지미 르뵈프를 알고 있으며, 레스터의 어머니 클레어를 간호하기도 했었다.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는 레스터를 위로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렇게 이타적인 삶을 사는 그녀이지만, 남편 더글라스 켄빌을 잃고 하나 있는 아들 제이슨과도 소원하다. 그녀를 지탱해주는 건 할머니 마거릿 앤 수녀가 전해준 신앙심 정도가 아닐까. 그녀가 에식스 카운티에서 최고령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할머니를 찾아가 나누는 대화에서 다시 두 세대를 점프해서 이야기의 시원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 정도로 시공을 초월한 정밀한 이야기 서사 구조와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가공해낸 제프 르미어 작가의 내공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정밀하다기 보다 조금은 거친 톤의 제프 르미어 작가의 그림과 서사에는 울림이 배어 있다. 삶의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야 하는 보통의 삶 속에도 그렇게 깊은 비밀이 자리 잡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긴 여정 끝에 만나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내 삶에서 어느 순간 놓쳐 버린 시간과 다시 재회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언제나 그렇듯 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와의 대면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랑으로도 덮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우리네 삶이 품은 내면의 이야기를 제프 르미어 작가는 <에식스 카운티>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처음에 등장하는 <농장 이야기>에서 하늘을 나는 레스터의 모습을 보고 흔해 빠진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마벨 코믹 스토리가 아닌가 하는 나의 우려는 서사에 얽힌 주인공들이 차례로 나오면서 저절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검은색과 흰색의 여백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제프 르미어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밀도 높은 서사로 이루어진 에피소드들이 차례로 채워지면서 <에식스 카운티>는 비상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삶의 진실들과 마주하게 됐을 때, 과연 우리는 그 사실을 선뜻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역시 고수 답게 작가는 사전에 그런 떡밥들을 모처에 조심스럽게 심어 두었다. 그리고 수확기에 농부가 그동안 정성 들여 키운 작물을 거둬들이듯, 작가는 아름답게 영근 이야기들로 대미를 장식한다.

 

<에식스 카운티>가 보여주듯, 우리네 삶은 마치 비포장도로를 운전하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울퉁불퉁한 그런 길을 가듯, 살다 보면 우리네 삶에는 예상치 못했던 상처도 있을 수 있고 배신과 모략을 비롯해서 상상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생전 아이라고는 보지도 못한 중년의 남자가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십대 소년을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듯이 말이다. 바로 그런 순간에 짜증을 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런 일탈과 예상하지 못한 삶의 변수야말로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삶의 진실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재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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