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간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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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무사[武士:부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미 여사의 <얼간이>를 읽었다. 이번 설날은 확실하게 미미 여사의 미야베 월드 제 2막 시대물과 함께 보냈구나 싶다. 가만 그런데 제목이 <얼간이>(뽕꾸라, 바보)라니. 고대해 마지않던 무사 이야기가 나왔는데 도대체 누가 얼간이란 말인가. 짐작대로다, 주인공 이쓰즈 헤이시로가 바로 그 얼간이란 말이다.

 

시대물이 그리는 어느 시대고 당대의 지명과 관직 그리고 풍습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면 해당 시대물을 애정하기란 쉽지 않은 미션일 것이다. 사실 미미 여사의 에도 시대물을 읽으면서 오캇피키(발음도 물론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요리키, 도신이나 주겐 같은 관직 이름은 물론이고 하오리, 다스키 같은 복식도 낯설기 짝이 없다. 사실 캐릭터들이 외출할 때 어떤 복식을 갖추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저자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 또한 몰랐을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얼간이>에서는 에도의 신도시에 해당하는 혼조 후카가와 지역과 소설의 주요 공간적 배경이 되는 뎃핀 나가야에 대해 상세한 설명으로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도해를 보고 나니 확실히 오토쿠 아줌마가 감자 조림과 곤약 조림을 파는 간이식당에 대한 대강의 이미지를 잡을 수가 있었다. 고마워요 미미 여사.

 

아울러 에도 막부가 일본을 통치하던 시절, 철저한 신분제에 근거한 봉건계급사회 시스템에 대해서도 설명이 뒤따른다.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던 무사들은 느슨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치밀하게 조직된 사회시스템으로 인구 백만에 달하는 남초 소비도시 에도의 피지배계급인 평민과 상인 계급을 통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얼간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우선 주인공 이쓰즈 헤이시로는 사십대 중반의 도신(하급 무사)으로 연간 쌀 서른 섬의 봉록을 받는 마치 담당 순시관이다. 왠지 무사라고 하면 칼도 마구 휘두르고, 소시민들을 무시하는 그런 거만해 보이는 그런 고정관념으로 다가오는데, 이 양반 헤이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이 담당을 맡은 뎃핀 나가야에서 간이식당을 운영하는 오토쿠 아줌마네 집에 수시로 들러 끼니를 때우지만, 거저 얻어먹지 않고 항상 셈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천성이 게으른데다가 무사태평을 신조로 삼고 있으며, 단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 취향마저 보여준다. 헤이시로의 상사는 그런 그의 특성을 꿰뚫고 보고, 새로 개발된 혼조 후카가와에 세상물정에 환하면서 동시에 물렁한 그를 임시 순시관으로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세월 좋게 살았으면 좋겠지만 어디 세상사가 그런가. 뎃핀 나가야의 채소 가게에서 기묘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헤이시로는 본인이 원하지 않는 그런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게다가 협박 때문에 뎃핀 나가야의 고참 관리인인 규베마저 줄행랑을 쳐버리고, 나가야의 주인인 미나토야의 소에몬은 풋내기 사키치라는 정원사를 임시 관리인으로 파견한다. 뎃핀 나가야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오토쿠 아줌마는 과부로, 간이식당을 운영하면 생계를 꾸리는 당찬 여걸로 이런 사키치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게다가 불길한 새로 여겨지는 까마귀 간쿠로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것도 마뜩치 않기만 하다.

 

미스터리의 대가답게 미미 여사는 이런 방식으로 적재적소에 꼭 필요한 캐릭터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녀가 야심차게 준비한 <괴한>, <노름꾼>, <통근하는 지배인>, <논다니>, <절하는 남자> 등의 짧은 에피소드들은 소설 <얼간이>의 근간이 되는 핵심 이야기 <긴 그림자>를 위한 포석이다. 존속살해, 노름에 미쳐 딸자식을 팔아먹은 통장이 아버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아이 이야기, 화류계를 주름잡던 오쿠메 그리고 항아리 신앙 때문에 잘 지내던 나가야에서 야반도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별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면서도 대미를 장식할 미나토야 소에몬이 숨기고 싶은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헤이시로는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받게 된다. 우선 범죄자에서 갱생하여 탐정 역을 맡게 된 오캇피키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에코인의 모시치 대행수(드디어 크로스오버가 되는 건가)의 뒤를 이어 활약하고 있던 마사고로, 암기천재 짱구와 함께 일하면서 자신의 선입견에 대해 재고해 보게 되는 계기도 마련하게 된다. 막부의 밀정으로 암약하는 오랜 지기 까만콩으로부터 보통 사람들은 접할 수 없는 아주 은밀한 정보도 취합해서 미스터리를 푸는데 유용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미래 자신의 양자 후보이자 처조카로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당돌한 12세 소년 유미노스케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계측과 측량의 달인으로 사사키 사부에게 배운 것을 실전에 활용하는 응용력이 대단하다. 그리고 아무래도 성인의 시선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아이의 시선으로 사건에 접근해 가는 방식도 눈여겨볼만한 지점이다. 소설 <얼간이>를 읽으면서 헤이시로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능력 때문에 상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타인에게서 빌려 쓰는 능력이야말로 그의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일을 내가 다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별난 능력을 가진 놈들의 활약이 하모니를 이루면서 대단원으로 달려가는 장면을 도저히 놓칠 수가 없어 설날 연휴의 어느 새벽 세시까지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소설의 말미에서 주인공 헤이시로가 대면하게 되는 과연 무엇이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극히 평범한 능력의 하급 무사 헤이시로가 거대한 음모와 마주치게 되었을 때,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되는가. 사실은 사실을 숨기고 싶은 권력이나 금권을 가진 이들에 의해 언제라도 자의적으로 왜곡되고 재단될 수 있다. 그렇게 된 사실을 과연 사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바로 그 지점에서 얼간이 무사 헤이시로의 인간적 고뇌가 시작되는 것이다.

 

숨 가쁘게 <얼간이>를 읽어내자 바로 후속편에 해당하는 <하루살이>와 미미 여사가 자신 있게 선보이는 연애소설이라는 <진상>이 읽어 싶어졌다. 당장 읽어야 하는 책들을 읽는 대로 다시 미미 여사 시리즈에 도전할 계획이다. 이달에만 무려 5권의 에도 시대물을 읽었는데, 이런 스피드라면 나머지 시리즈도 조만간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미시마야 변조괴담 시리즈보다는 무사 헤이시로가 등장하는 수사물이 더 마음에 든다. 그런데 헤이시로는 칼만 차고 다니고 정작 사용은 하지 않는 건가, 궁금하다.

 

[리딩데이트] 2015220~22일 오전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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