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퇴장 주커먼 시리즈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저 필립 로스의 신작 <유령 퇴장>의 원제인 Exit, Ghost는 셰익스피어 희비극에 나오는 무대 용어라는 말로 이 리뷰를 시작하고 싶다. 누가 읽어도 노대가의 얼터 이고(alter ego)가 분명한 네이선 주커먼을 전면에 내세운 소설 <유령 퇴장>은 2011년 911테러 이후, 테러가 일상의 위협이 되어 버린 시절에 남성성을 잃은 71살 노작가의 욕망 고백이다.

 

탱글우드 축제로도 유명한 버크셔 산골에 지난 11년간 자발적 혹은 타의에 의한 은둔을 하던 주커먼은 암에 걸려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으로 복귀한다. 더 치명적이었던 것은 예의 암이 근원지가 전립선이었고, 생존을 위해 선택한 전립선 절제술은 문필가로 필명을 날리던 노작가를 요실금 때문에 기저귀 차고 다니는 한물 간 노인네로 격하시켰다는 점이다. 그냥 그렇게 조용하게 근치 치료를 마치고 다시 버크셔로 복귀하려던 주커먼의 계획은 뉴욕 리뷰 지의 광고란의 부동산 교환 공고를 보고 전화 다이얼을 돌리는 순간, 무모한 순간으로 돌입하게 된다.

 

여느 작가들처럼 노숙한 주커먼 역시 노년에 자신의 영감을 불러 일으켜줄 대상으로 젊은 여성을 골랐던가. 30대 초반의 여피 부부 제이미 로건이 대상이다. 이미 발기불능으로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을 상실한 주커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성으로서의 욕망마저 거세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소설가를 꿈꾸는 제이미와 그녀의 남편 빌리 데이비도프(유대계 미국인)는 1년 정도 뉴욕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서 집필 활동을 꿈꾼다. 그런 마당에 나름 이름난 작가인 주커먼의 산골 오두막에서 지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황홀한 경험이겠는가.

 

소설 <유령 퇴장>은 노년의 작가와 여피 부부의 미묘한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한 때 젊은 시절의 주커먼이 숭배해 마지않던,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불세출의 작가 E.I. 로노프(이하 매니 로노프)를 필립 로스는 등장시킨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을 중심(이복누이와의 근친상간)으로 한 전기를 통해 일약 문단의 스타가 되려고 결심한 제이미의 전 남자친구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리처드 클리먼은 집요하게 주커먼에게 매달리면서 자신에게 협조를 요구한다. 그가 그렇게 뻔뻔하게 나오는 데는, 로노프의 마지막 애인이었지만 이제는 암에 걸려 역시 치료 중인 에이미 벨레트가 건네준 로노프의 장편 소설 사본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유령 퇴장>은 2004년 재선을 노리는 조지 W. 부시와 민주당 대선후보 존 케리의 대결 시기인 10월말에서 11월초까지의 일주일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세계대전을 치르면서도 공격받지 않았던 미국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에 의한 충격을 제이미 로건의 다양한 방식의 공격적인 언사를 통해 필립 로스는 절실하게 그려내고 있다. 텍사스 휴스턴 유전재벌 아버지를 둔 제이미는 별다른 직업 없이, 물가 비싸기로 유명한 뉴욕의 어퍼사이드 아파트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자신을 숭배하는 남편까지 둔 그런 매력적인 여성이다. 임포텐츠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무기력한 노작가의 치열한 욕망 고백은 한편으로는 자신이 숭배해온 작가 로노프를 방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을 에이미에게 약속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필립 로스가 진짜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저물어 가는 삶의 말년에 서서 훗날 어떤 치기 어린 젊은 작가가 나서서 자신의 삶을 들춰내서 망신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아니었을까? 노골적인 작가의 욕망을 <그와 그녀>라는 다이얼로그 방식으로 풀어나가면서도(필립 로스의 문학적 상상인지 아니면 실재했던 이야기인지 그 경계마저 모호하다), 자신이 올곧게 주장하는 ‘젊은이들이여 제발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말라’는 경고는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도 젊었을 적에는 그랬었노라고 말하는 모순에도 도달한다. 성공과 명성을 원하는 리처드 클리먼(저널리스트 혹은 작가지망생)을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막을 것이냔 말이다. 자신만의 신화에 흠집을 내고, 성공에 집착한 남자를 모욕하는 방법으로 타격을 가하려는 주커먼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설사 그가 전혀 사실이 아닌 주장으로, 로노프에 대한 (의도적) 명예훼손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밝혀줄 사람은 이미 사자(死者)가 아니었던가.

 

필립 로스는 반복해서, 욕망에 사로잡힌 주커먼의 언동이 무모하다고 곳곳에서 독자에게 신호를 보낸다. 문단에서 성공을 거둔 것 말고는 전혀 내세울 게 없는 자신보다 무려 40살이 많은 이 노땅 작가에게 제이미 로건이 뭐가 아쉬워서 끌린단 말인가. 그녀에게 돈이 부족한가, 배움이 모자라나(그녀가 하버드 출신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11년 전에 시작된 살해 협박 때문에 자발적(?) 은둔에 들어간 주커먼은 자신의 인생에 아무도 들이지 않는 삶의 방식을 고수했지만, 일견 무모해 보이는 순간의 욕망 때문에 판단착오의 연쇄반응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에 눈이 먼 주커먼이 치명적인 실수로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필립 로스 정도 되는 작가가 그 정도의 분별력은 가지고 있겠지.

 

<유령 퇴장>은 올해 82세의 필립 로스가 지난 2007년(75세)에 발표한 주커먼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다. 70대 노대가는 여전히 자신만의 영역에서 자신의 언어로 빛나는 순간을 창조해내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점령당한 밀레니엄 캐피탈 거리에 대한 생생한 묘사, 문인과 문창생 간에 끝없이 이어지는 현학적 대화 그리고 클리먼 같은 풋내기 부수기야말로 생의 마지막을 앞둔 문학 십자군인 자신의 마지막 임무라고 선언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과연 스스로를 ‘유령’이라고 생각한 얼터 이고의 ‘퇴장’이 사실일까. 살아 있는 미국 문학의 전설이 되어 가고 있는 필립 로스의 대단원은 어디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