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정 문어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3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아침 출근길에 어느 커플이 지나가는 걸 봤다. 그런데 둘이서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여자친구로 보이는 사람의 인상이 아주 못마땅해 보였다. 그러면 맛있는 걸 같이 먹으면서, 이유에 대해 같이 이야기해 보면 좀 풀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침이다 보니 토스트나 김밥 혹은 샌드위치로 해결해야 하니 그것도 좀 난망해 보였다. 가능하면 고즈넉한 저녁 시간에 팔팔 끓는 국물 요리라도 앞에 두고 이야기를 시도해 보면 한결 낫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다.

 

며칠에 걸쳐 다나베 세이코 여사의 <춘정 문어발>을 읽었다. 다 읽고 나니 예의 커플의 남자친구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사실 다나베 세이코 여사의 필명은 오랫동안 들어왔으면서도 정작 처음으로 읽은 책이 바로 <춘정 문어발>이었다. 인간사 오욕칠정 중에 애욕과 식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일까. 아무래도 여성 작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다양한 맛을 자랑하는 요리와 재료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남녀 간의 애정(愛情)의 형태를 유쾌하게 들려준다. 모두 8편의 에피소드가 실린 이 소설집은 읽을수록 감칠맛(우아미)이 난다.

 

여성작가이면서도 에피소드의 모든 화자는 하나 같이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양보 못한다는 사고로 단단하게 무장한 남정네들이다. 그런데 다나베 세이코 여사는 그들이 추구하는 식탐의 이면에 또 애정 전선을 구축한다. 모름지기 음식의 코드에는 나눔이 빠질 수 없다는 반증일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홀로 먹는 것은 궁상스러워 보인다. 그렇다고 주인공 남자들이 가이세키나 일류 회요리 같은 고급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천박(?)해 보이는 길거리 음식인 다코야키, 오코노미야키 혹은 제대로 만든 일본 계절요리를 원한다.

 

문제는 그들의 파트너들이 손품이 많이 간다는 둥, 요즘에는 누가 그런 구식 음식을 먹느냐면서 타박을 하고 음식 기행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남자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까지 감행하면서 자신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기쓰네(유부) 우동 같은 자칭 천박한 음식에 탐닉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다나베 세이코 여사는 그럼 연인보다 음식을 택한 건가라는 질문도 빼놓지 않는다. 초년의 불꽃 같이 타오르는 사랑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고른 주인공들은 모두가 중년 혹은 초로의 신사들로 “크림” 냄새 나는 서양식 보다 정통 일본식을 고집한다. 이런 음식에 대한 집착이야말로 그들이 당면한 갈등의 단초가 된다.

 

또 하나 주인공들의 희구하는 음식은 추억의 요리들이다. 그냥 끼니를 때우기 위해 배를 채우는 그런 음식이 아니라, 과거를 떠올리고 회상하는 특별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그러니 손품이 많이 간다는 이유로 제작을 거부하는 부인들에게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처구니없이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요상한 도치법까지 사용해 가면서 그런 상황에서 남자는 그럴 수밖에 없노라는 핑계까지 대지 않는가. 산더미 같이 쌓인 고래 고기를 스테이크로 요리해서 먹거나 미즈나를 넣은 고래 스키야키를 ‘아작아작 냄비’라고 부르며 끓여 먹던 시절은 오롯하게 개인적인 것인데, 고로나 오바케에 대한 남자의 집착을 어떻게 현재의 아내와 딸이 이해해 줄 수 있겠는가. 다나베 세이코 여사는 반복해서 그야말로 초코파이 정(情)이 담긴 남자들의 요리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킨다.

 

 

반전의 재미도 일품이다. 다코야키 애호가로 대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노총각 나카야는 홀로된 어머니와 같이 살 신붓감을 구하다가 그만 혼기를 놓쳐 버렸다. 자신에게 거침없이 대하는 요즘 처녀들에게 눈살을 찌푸리고, 천생연분 짝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죽어버려, 대머리’ 같은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데루코라는 처자와 다코야키 인연으로 무언가 잘되어 간다고 싶었지만, 알고 보니 그 끝자락이 불륜이었다는 외통수에 직면한다. 자신에게 딱 맞는 짝이라고 생각했던 데루코는 그저 다코야키 메이트가 되길 원하는 연상의 뻔뻔한 아줌마였다는 사실에 대머리 노총각은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재밌는 건 요리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헤어진 전처와 우연히 만나 화해하고 갈등을 풀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긴 정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밥정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처음 데이트를 시작하는 연인들이 그렇게 무섭게 먹는 것에 매달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인간은 본능적으로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밥정을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미리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 다나베 세이코 여사는 이 맛깔스런 소설집에서 은연중에 일본 요리에 대한 자긍심을 곳곳에 심어 두고 있다는 점이 느껴졌다. 팔팔 끓는 복지리 요리에는 맥주보다는 도쿠리에 담아 데운 니혼슈가 어울리고, 적생강이니 흰된장 같이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간사이 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일품요리로 유명한 오사카의 서민 요리에 방점을 찍는다. 이와 더불어 가정과 직장에서 소외 받는 중년 남성들의 대체 취미로 말하기 부끄러운 ‘방정하지 못한’ 식도락을 추천하기도 한다. 날이 쌀쌀해지는 초겨울 퇴근길에 자신만의 단골집을 찾아 돼지고기 기본 오코노미야키를 주문해서, 시원한 맥주 한 조끼를 걸치며 상상력이 가미된 요리를 즐기는 재미도 없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다나베 세이코 여사는 묻는 것처럼 들린다.

 

한동안 진지한 책들을 읽는 통에 그냥 무턱대고 가벼우면서도 재밌는 소설을 읽고 싶었었는데 다나베 세이코 여사의 <춘정 문어발>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제 시작하는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출발이 산뜻해서 너무 기분이 좋다. 선택지가 많으니 배스킨 라빈스의 31가지 아이스크림처럼 골라 읽는 재미를 느껴보고 싶다.

 

리딩데이트 : 2014년 7월 22일 ~ 7월 26일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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