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나무와숲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연달아 “이민자 소설”을 읽게 됐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작년부터 이창래 선생의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는데, 읽기는 이제야 읽게 됐다. 개인적으로 이창래 작가를 굳이 한국계 미국작가라는 타이틀보다 그냥 미국 작가라고 부르는 편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를 한국 출신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 그의 작품을 하나둘씩 읽으며 느낀 바가 있었다. 한국 작가를 한국 작가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가 그의 작품에서 읽히지 않았다. 그저 보편적 삶의 일면을 잡아내는 미국에 사는 한국이란 원형을 지닌 작가의 글이라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점 하나, 왜 그는 존 강 같은 미국 이름 대신 부르기에도 어려운 이창래라는 본명을 굳이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이창래 작가는 미국 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작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거나 팬덤을 가진 것 같지는 않다. 당장 온라인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그의 책이 많지 않다는 점이 이런 나의 가설을 반증한다. 나온지 얼마 안 되는 신간 <온 서치 어 풀 시> 외에 모두 4권의 책이 국내에 소개되었는데 작년 초에 나온 <생존자> 말고는 모두 절판과 품절이다. 그의 작품 세계의 시원을 밝혀줄 <영원한 이방인> 역시 헌책방에서 어렵사리 구해서 읽게 됐다.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친구에게 선물한 책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헌책방에서 만나게 됐다. 나라면 표지에 그렇게 사연까지 적어준 친구의 책은 절대 팔지 않았을 텐데.

 

원제 <Native Speaker:영원한 이방인>의 주인공은 헨리 파크다. 한국식 이름은 박병호 씨였던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한국 이민자이자 플러싱에서 청과상을 하며 성공을 일군 입지적전 이민 1세대의 아들 헨리 파크는 준수한 대학 교육을 받고, 진짜 미국 여자와 결혼까지 해서 미국인으로 연착륙하는데 성공한 남자다. 소설은 그런 성공한 미국 남자의 파경에 다다른 결혼 생활로 시작된다. 추락의 저편에는 상실이 담겨 있다. 사랑하는 아들 밋을 불의의 사고로 잃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모종의 스파이 업무(끝까지 헨리의 임무가 무엇인지 정부인지 개인의 사적 임무인지 밝혀지지 않는다)를 수행하는 헨리의 직업 때문에 아내 릴리아는 그의 곁을 떠나려고 마음먹는다. 그것도 거의 모욕에 가까운 메시지를 남겨둔 채 말이다.

 

자연히 소설의 서사 구조는 플래시백 기법을 채용해서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가지 축으로 헨리 파크 혹은 직장에서는 ‘파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박병호 씨 삶의 궤적을 추적해 가기 시작한다. 한국의 유수의 대학을 나와 뉴욕의 청과상을 하는 헨리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민 선배가 그랬듯이 착취당하며 그들에게 일과 사업하는 법을 배우고, 시간이 흘러 자신이 그 자리에 올랐을 적에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후임 이민자들의 노동을 착취해 가며 사업을 일구고, 성공적인 이민 가정을 꾸리는데 전력을 다한다. 아무래도 이 과정에서 줌파 라히리의 이민자 소설보다는 좀 더 유교적인 (이민)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진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면면이 드러나게 된다.

 

다른 하나는 현재 파키, 헨리 파크 그리고 박병호 씨가 맡고 있는 주 임무인 성공한 뉴욕시 의원 존 강에 대한 보고서 작성이다. 가족의 상실과 해체라는 불행을 겪은 파키는 어쩔 수 없이 직장에서의 임무에까지 영향을 받은 모양이다. 아마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였을 것이다. 아시아인답게 꼼꼼한 일처리를 인정받던 파키가 고객의 의뢰 대상자인 필리핀 출신 정신과 의사와 선을 넘어 지나치게 친해지는 바람에 결국 직장 상사인 데니스 호글랜드의 눈 밖에 나고 만다. 어찌어찌 덮고 넘어가게 된 파키에게 보스 호글랜드는 새로운 일거리를 맡긴다. 플러싱 출신으로 소수민족 출신 시의원인 존 강은 시장 출마라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인종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한창 매스컴의 각광을 받는 인물이다. 물론 자수성가해서 성공한 사업가라는 이미지를 바탕으로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역시 정치판에서 좋은 이미지 구축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느낌이 들었다. 파키는 바로 이 전도유망한 정치인 존 강의 캠프에 침투해서 그의 모든 것을 보고서로 작성하라는 특명을 맡는다.

 

파키는 자신의 삶에 등장한 다양한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신산하기 짝이 없는 미국 이민사회의 은밀한 속살을 조금씩 내보인다. 상부상조라는 유교적 질서에 입각해서 이룬 존 강의 성공신화는 모래성처럼 그렇게 무너지기 쉬운 기반 위에 세운 것이었다. 소설 속에서 파키가 고백하듯, 미국 사회로의 완전한 동화는 미국 건국 이래 WASP가 아닌 소수민족에게 여전히 쉽지 않은 임무다. 고등교육을 통한 완벽한 영어 구사와 전문 분야에서의 성취는 파키의 아버지로 대변되는 이민 1세대에게는 기대하기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1.5세대인 파키에게도 예의 미션은 여전히 쉽지 않은 미션으로, ‘영원한 이방인’으로서의 고단함과 불안이 소설의 곳곳을 누비고 있다.

 

솔직히 <영원한 이방인>은 연이어 읽은 <생존자>처럼 엄청난 몰입도를 자랑하지 않는다. 어느 새내기 작가의 데뷔작이어서 그랬을까?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절대보편이 보이지 않아서였을까? 어쩌면 좀 오래된 번역 탓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중요한 갈등 구조를 이루는 릴리아와의 불화의 근원을 추적하는 과정과 파키의 성장기는 흥미로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또 다른 중요한 이야기의 축인 존 강의 점진적 부상과 극적인 추락은 상대적으로 힘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에 반해 <생존자>의 구성과 전개는 연륜과 작가의 내공이 쌓인 덕분인지 가히 엄청났다.

 

원제보다 <영원한 이방인>이라는 우리나라 제목이 더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어쩌면 이창래 작가가 쓴 영어가 아닌 번역판으로 읽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 내내 파키는 진정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이미 그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유년 시절의 교육과 속어나 은어, 자기들끼리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공유하면서도 결국 소위 말하는 주류사회에 동화될 수 없어 결국 정체미상의 (산업) 스파이가 되고 만 이방인이라기보다 오히려 경계인(marginal man)에 가까운 작가의 페르소나 파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졌다. 오늘도 여전히 안녕하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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