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줌파 라히리하면 어쩔 수 없는 허핑턴 포스트의 아니스 쉬바니가 꼽은 15명의 과대평가된 미국 현대작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15명 중에 당당하게 10번째로 선정된 줌파 라히리의 글이 도대체 어떻기에 이런 가혹한 평가를 서슴지 않고 내렸는지 궁금하다. 최근작 <저지대>를 읽기에 앞서 그녀 작품 세계의 근원을 알 수 있는 첫 번째 작품 <축복받은 집>을 읽는 게 순서일 것 같아 이 책부터 읽게 됐다. 그리고 모두 9개의 소설이 실린 이 소설집으로 단박에 퓰리처상을 수상하면서 미국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어떤 이는 등단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건만, 또 누구는 이렇게 신데렐라가 되는구나 싶었다.

 

줌파 라히리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녀 부모의 출신은 인도 서벵골 출신으로, 그녀의 작품을 소위 <이민자 소설>이라고 부르게 하는 근원을 제공한다. 2살 때, 라히리의 가족은 미국 로드 아일랜드로 이주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소설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로드 아일랜드 대학에서 사서로 일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를 통해 그녀의 약력을 읽다 보니, 그녀 소설의 고갱이를 접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들이 서벵골의 문화를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종종 고향인 캘커타를 방문하곤 했다고 한다. 이 역시 <질병 통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보스턴 대학에서 다양한 학위를 취득하고, PhD까지 받은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는 보스턴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이 많다. 나도 한 때 살았던 곳이라 그런지 그녀 소설에 나오는 지명이 아주 익숙해서 읽는 동안, 등장인물의 동선을 따라 잡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왠지 그녀의 작품에서의 공간은 그녀 부모의 고향인 동양과 그녀가 나고 자란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로 나뉘는 느낌이 드는데, 문득 그녀가 벵골에서 자라났다면 그녀가 지금 미국 문학계에서 누리는 지위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출간되기 전 <뉴요커>에 발표된 <섹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내로서는 최악의 악몽이었어”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유부남을 만난 여자 미랜더의 이야기다. 직장 동료 락스미와 수다로 락스미의 사촌 형부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바람이 났다는 이야기는 미랜더의 불길한 미래에 대한 전조로 다가온다. 사랑인지 욕망인지 알 수 없는 불길 같은 감정에 휩싸인 미랜더는 꼬마 로힌이 정의하는 “섹시”란 말뜻을 듣고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냉정한 판단을 내린다. 자신의 정부가 자기에게 섹시하다고 말했는데,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섹시의 뜻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라는 말에 미랜더는 비로소 깨달음에 도달한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센터 마파리움에서의 추억은 이제 과거가 되어 버린다.

 

원작에서 타이틀이었던 <질병 통역사>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다. 미국으로 이주한 인도계 미국 가정의 관광 가이드에 나선 카파시 씨는 관광가이드이면서 병원에서 질병 통역사라는 아주 흥미로운 직업을 가진 사나이다. 그의 꿈은 원대했지만, 실상은 고작 고향에 남아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가이드일 뿐이다. 다스 부부를 안내하며, 다스 부인과의 지속된 우정에 대해 상상해 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가 들려주는 충격적인 사실에 카파시 씨는 자신이 꿈꾸던 일들이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단편소설의 정수인 삶의 진실에 다가가는 찰나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줌파 라히리는 문학이라는 틀을 통해 미국 주류 사회에 진입했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 인도계 이민자들의 삶에 대해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도 고유의 음식을 해먹고, 인도 식품점에서 비디오를 빌려다 보고, 결혼 배우자를 인도 본국에 가서 구해오는 삶의 방식이 한편으로는 낯설면서도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뭔가가 그녀의 글에는 배어 있다. 그 점이야말로 타국에 사는 이민자 혹은 이방인으로서 이질감의 원형이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루는 서양(미국)에서의 삶에 대한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동양(인도)의 삶에는 딱히 이렇다라고 표현하기 그런 비루함이 한 층위를 이룬다. <진짜 경비원>에 나오는 계단 청소부 부리 마의 이야기가 그렇다. 공동주택 청소부인 부리 마는 자발적으로 경비원 역할까지 떠맡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무 일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달랄 부부의 호의로 공동주택의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용 세면대를 설치하게 되면서 부리 마가 추후에 겪게 될 비극은 잉태된다. 공동주택의 거의 모든 이가 자기 집 보수에 정신이 없고 사설 경비원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던 부리 마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들이 아끼던 공용 세면대가 털리자 흥분한 사람들은 부리 마의 탓으로 돌리고 다른 “진짜” 경비원을 채용하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공동체의 안위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사적 이익이 침해받을 경우 사정없이 공동체원을 내쫓을 수 있다는 냉혹한 폭력의 실체를 슬쩍 엿볼 수가 있었다.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인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은 테크(MIT) 도서관의 사서로 미지의 대륙에서 새출발하는 줌파 라히리 아버지의 과거를 재현해낸다. 테크나 하바드에 다니는 남자에게만 방을 내준다는 고약한 집주인 밑에서 소위 ‘마지막 대륙’에서의 삶을 시작하는 나의 소소한 일상이 화자의 내러티브를 타고 전해진다. 미국의 달착륙 사실을 인류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며 세입자에게 ‘굉장하다’라고 말하라고 강요하는 크로프트 부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팍스 아메리카나의 발로로 보면 과장일까. 라히리의 아버지는 새로 결혼한 아내 말라의 합류로 가정을 이루고, 세 대륙에서 살아남은 끈질긴 자신의 생명력에 자부심을 가지며 신세계에서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은 없노라고 선포한다.

 

삶의 진실을 마주할수록, 사랑이라는 과제가 쉽지 않다는 걸 작가는 9개의 소설을 통해 들려준다. 이런저런 질곡이 있다고 해서 사랑을 마다할 수는 없지 않은가. <축복받은 집>을 읽고 나서 확실히 느낌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문단의 찬양처럼 그렇게 대단한 작가일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출발은 나쁘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