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박종대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4월에 읽을 책에 대한 리뷰를 9월에 쓰려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책을 다시 뒤적거리면서 리뷰를 쓰게 됐다. 책의 제목인 <주말>처럼 주말 동안 벌어진 일을 어느 4월의 주말에 다 읽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안되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리는 독서였다는 기억이 난다.

 

최근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를 통해 슐링크의 소설집 이야기를 들었고, 올해 4월에 읽은 슐링크의 장편 소설 <주말>을 읽었지만 리뷰를 쓰지 않았다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의 의식을 치르지 않았구나 싶었다. 소설 <주말>은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기술한 어두운 독일 현대사의 후일담이다.

 

어느 주말, 전설적인 독일 적군파 테러리스트 외르크의 석방에 즈음해서 그의 석방을 기념하기 위해 11명의 친구들이 모인다. 그 중에는 외르크와 함께 적군파 활동을 했던 동지들도 있으며, 외르크의 친누나로 이 모임을 주최한 크리스티아네가 중심에 있다. 친구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글 쓰는 교사, 전직 조직원이었다가 전향해서 덴탈랩을 운영하며 성공한 사업가가 된 치과기공사, 저널리스트, 외르크의 구명을 위해 노력한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작가가 펼치는 흥미로운 서사를 위한 모든 직업이 동원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외르크는 저널리스트이자 동료였던 헤너가 자신을 밀고했다는 생각을 감방에서 지낸 20년간 품고 있다. 이 설정만으로도 초반에는 서로 회피하지만, 가공할만한 폭발력일 가진 이야기라는 사실을 독자는 짐작하게 된다. 사업가 울리히의 딸인 도를레가 외르크를 유혹하는 해프닝은 서사의 전개에 긴장감을 고조한다. 이젠 혁명 따위가 다 뭐냐, 먹고사니즘이 최고다라는 자본주의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전향자 울리히는 스스로 옹립한 정당성을 웅변한다. 동시대의 동지들은 모두 변신해서 사회의 한 축을 구성하는 일원으로 살고 있지만, 여전히 20년 전 외르크의 이데올로기에 취해 다시 한 번 혁명의 깃발을 치켜 올리기를 기대하는 청년 마르코 한의 등장은 조금 낯설게 다가온다.

 

물론 슐링크가 이 정도로 3일간의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를 이끌어 가지는 않는다. 배신의 진짜 주인공을 밝히고, 또 외르크의 과거사를 촉발시키는 새로운 등장인물을 투입하면서 이야기는 긴장으로 치닫는다. 외르크를 석방시키는데 공헌을 한 변호사 안드레아스와 열혈청년으로 여전히 혁명을 꿈꾸는 마르코 한의 대립은 소설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한편, 주변에서는 자신의 진로를 두고 옥신각신하지만 정작 외르크 자신이 꿈꾸는 삶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담장 밖의 평범한 삶을 원하지 않았을까? 긴 투옥 끝에 그가 기대한 건, 소설에 나오는 그런 갈등이 아니었으리라. 우리는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슐링크가 이 소설을 통해 던지는 질문의 파문은 은근하면서도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다양한 군상이 등장하는 <주말>을 통해 슐링크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독일 전전세대와 전후세대의 갈등에서 시작된 대립과 단절의 역사에 대한 고찰이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W.G. 제발트가 <공중전과 문학>에서도 말했듯이, 비참했던 과거를 집단의 기억에서 배제하고, 조국재건이라는 테제 아래 매진했던 기성세대의 허위와 위선을 공격했던 적군파 집단은 극한 무력투쟁을 주장하며 점차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그들의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그들의 투쟁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던 다수 대중에게 외면 받은 운동은 결국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문제는 자신들이 옳았다고 생각했던 전후세대도 시간이 지나 아버지 세대가 되면서 반복되는 대립과 단절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이 슐링크의 지적이다. 전전세대를 나치 노인네라고 부르며 살인자라고 비난했지만, 전후세대의 대표 주자인 외르크 역시 4명의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고 24년형을 살지 않았느냐는 페르디난트의 비난이야말로 소설 <주말>의 핵심이다.

 

물론 슐링크는 이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제시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에게 당면한 과제인 지하실에 고인 물을 파내는 협업으로 일촉즉발에 대한 갈등을 미봉하고 마무리하는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방식이야말로 그들에게 최고의 해결책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고 그 시절의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점이 되면 옳고 그름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해결책이다라는 무책임한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나머지 판단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주관에 따른 것일 테니까.

 

슐링크가 이 시대 마지막 테러리스트의 삶을 통해 던지는 여러 질문은 깊은 잔상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