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언수 소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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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여름 김언수 작가의 글과 처음으로 만났다. 문학동네 카페에서 연재된 <설계자들>의 인연으로 출간 즈음한 모임에서 작가도 처음으로 만날 수가 있었다. 킬러를 주인공으로 삼은 장편 <설계자들>은 그 소재의 선택에 있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9편의 단편을 모은 소설집 <>으로 그를 다시 만날 수가 있었다.

 

<설계자들>도 그랬지만 이번 소설집 역시 잘 읽힌다. 타이틀인 <>을 제외하고는 소설집에 실린 순서대로 읽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읽었다. <>에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삶을 접하게 된 어느 십대 소년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라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누구나 꿈꿔 왔지만, 그 시절에는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기득권에 대한 반항 때문에 억울하게 테니스장과 화장실 청소를 해야 했던 나의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남고 학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문학과 조우하게 되었노라는 서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만난 문학은 분노에 차 샌드백에 쉴 새 없이 잽을 날리고, 풋워크를 배우는 예의 십대 소년에게 뿐만 아니라 전쟁터인 이 세상을 사는 모두가 언젠가는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꼭 만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인스톨인 <금고에 갇히다>는 설정이 멋지다. 일확천금을 노리며 어느 부자의 특수강으로 만든 사설금고에 갇힌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이야기는 우리가 꿈꾸는 성공신화의 허구를 그대로 드러내 준다. 성공강박에 빠진 사회는 그저 우리에게 노력해서 성공하라고 다그치지만 성공 이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어떤 삶이 성공한 삶인지는 전적으로 주관적이지만,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공식이 지배하는 비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엄청난 돈과 보석 그리고 금붙이 가득한 금고에 갇히지만 외부에 단절된 공간 속에서 그것의 가치는 제로(zero). 금으로 만든 주사위를 굴리며 베네수엘라 미녀와 해보려던 수작을 뱀놀이 승부에 목숨 거는 두 사내의 절박함에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비슷한 시절을 보낸 작가의 서술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선배 세대처럼 절박하지도 그렇다고 후배 세대처럼 세련되지도 못한 어중간한 시대를 보낸 세대의 고백이 줄줄이 이어진다. 어쩔 수 없이 마틴 스코시즈의 <비열한 거리>(Mean Street)<레 미제라블>을 연상시키는 <단발장 스트리트><꽃을 말리는 건, 우리가 하찮아졌기 때문이다> 모두 회한과 허무주의가 팽배해 있던 어느 시절과 묘하게 겹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아무런 꿈도, 야망도 그리고 미래에 뭐가 되겠다는 결심도 없었던 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가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인스톨은 역시 <참 쉽게 배우는 글짓기 교실>이다. 귤을 사가지고 집으로 귀가하는 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납치되어 비더게부르트라는 기묘한 장비에 올라 모진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자료만 있다면, 불필요한 기술은 제거하고 명료하면서도 짧은 문장을 쓰는 법을 배우게 되는 주인공의 비참함이 묘한 공명을 울린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이 어제부터인가 주권자 위에 군림하면서, 지배자 행세를 하는 경찰국가의 원형이 씁쓰름함을 자아낸다.

 

파리 목숨 같은 시간강사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그야말로 똥 덩어리 같은 시집의 발제문을 작성해야 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못해 엉뚱하게도 섹스를 하자고 선포하고 행동에 옮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지식인의 이야기, 집에 어울리지도 않는 소파를 들여 놓았다가 다시 빼내지 못해 친구에게 말도 안되는 시간에 도움을 청하는 명동에만 눌러 붙어 사는 사내 이야기, 실직으로 아내에게 구박을 받으면서 돌아가실 날만을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몸에 좋다는 알부민을 공급하기 위해 기세 좋게 아내의 통장을 들고 나섰다가 재수 털린 가장의 이야기 등등 이렇게 하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거창한 패러다임이 아닌 같은 소시민적 삶의 정곡을 찌른 서사가 참 마음에 든다.

 

마지막 인스톨인 <하구(河口)>에서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성공의 입구에서 그놈의 술 때문에 추락해서 시골로 내려온 사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술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설정이 주목을 끈다. 바닥까지 내려온 사내보다 고수들과의 술자리는 알코올의 유혹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사내를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이들이 보내는 황폐하기 짝이 없는 시간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그런 허황된 약속 따위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황홀한 시절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고작이다.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5년 주기로 돌아오는 위기로 자기계발 서적 대신 소설이 그 자리를 꿰찰 거라는 전망을 들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팽팽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글로 무장한 김언수 작가의 귀환을 축하하며, 돌아온 소설시대에 지속될 그의 날렵한 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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