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1 -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 샘깊은 오늘고전 15
유성룡 원작, 김기택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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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중에서도 사서(史書)를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과거에 벌어졌던 일을 교훈으로 삼아 현세에는 다시금 그런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421년 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당시 현장에서 치열한 외교전을 수행하고 지금으로 치면 국방장관을 역임하면서 전쟁을 치른 서애 유성룡 선생이 직접 남긴 기록인 <징비록>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교훈은 그 역사적 가치를 훨씬 뛰어 넘는다고 말하고 싶다.

 

당시 선조 임금의 통치 아래 있던 조선은 1392년 개국 이래, 200년간 이렇다 할 큰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서 문약해질대로 문약해진 상황이었다. 상대적으로 센고쿠 시대라는 전대미문의 내전기를 겪고, 66개의 사실상의 국가로 나뉘어져 숱한 전쟁을 치르며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토요도미 히데요시는 마침내 일본 전국을 통일한다. 내친 김에 토요도미 히데요시는 이웃인 조선과 명나라까지 정복하겠다는 일종의 과대망상에 빠져 전쟁 준비에 매진하게 된다. 물론 그 이면에는 언제라도 자신에게 등을 돌릴지 모르는 지방 영주들의 힘을 외부로 돌리려는 내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통일전쟁에서 공을 세운 가신들에게 나누어줄 영지 부족도 전쟁의 한 가지 이유로 사료된다.

 

지난 천년 동아시아 삼국이 모두 참가한 가장 큰 규모의 국제전쟁인 임진왜란의 싹은 이렇게 자라나고 있었다. 일본은 숱한 전쟁으로 단련된 역전의 용사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서양을 통해 유입된 조총(鳥銃)을 보병부대에 보급하고, 이를 이용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을 격심한 내전을 통해 쌓았다. 그런 반면, 장기간의 평화로 조선은 외부의 침략에 대응할 실제 전력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조선의 사대부는 문무양반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개국 이래 문신 우대 정책으로 무관의 자질은 문관의 그것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전쟁 수행 경험이 없는 문신이 지휘하는 군대는 전쟁 초기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당장 전쟁에 동원할 장정 또한 실제 동원할 수 있는 장정과 장부상의 그것이 달랐고 이런저런 사유로 병적에서 빠지는 인원 또한 엄청났다. 부패한 조정과 최고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선조의 우유부단은 전쟁 초반에 전쟁의 참화를 막을 수 있는 숱한 기회들을 헛되이 날려 버렸다.

 

전쟁에 앞서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들을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으며 임박한 일본의 침략을 대비할 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일본이 곧 침략할 것이라는 소수 의견은 무시되었고, 그나마 조선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 축성 등은 대전략의 부재로 별무소용이었다. 그리고 1592413일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의 1군이 마침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을 때, 조선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병력은 사실상 전무했다. 압도적인 군세를 자랑하는 적 앞에서 각 지역의 군지휘관들은 아예 싸워 보지도 않고 도주했으며, 당시 조선 제일의 명장이라는 이일과 신립은 상주전투와 탄금대전투에서 적군에게 처절하게 패배하면서 수도인 한성을 전쟁 개시 단 20일만에 내주게 되었다. 그리고 무능력한 군주인 선조는 국가의 근간인 백성은 외면한 채, 개성과 평양 그리고 의주를 넘어 극진한 사대의 예로 모시던 명나라로 망명까지 시도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닌가. 한국전쟁 당시 국군이 38선을 침공한 북한군을 격퇴하고 있다고 공포에 떨던 수도 서울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자신들은 기차를 타고 수도를 버리고 도주한 이승만의 그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두 번째 희극으로 반복된다고 했지만, 우리의 경우는 비극만 두 번 반복되었다.

 

서애 선생의 <징비록>을 읽으면서 가장 분노했던 장면 중의 하나는 피난길에 나선 선조 일행을 대하는 백성들의 태도였다. 국가가 평화로울 적에는 그렇게 위세를 부리던 지배 계급이 국가 위기 상황이 되자,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고 국가지도자마저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거의 멸망해 가던 국가를 지켜낸 것은 그런 비겁한 모습의 위정자들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아무런 시혜를 받지 못하던 백성들이 의연하게 일어선 의병과 서애 선생이 파격적으로 등용한 권율과 이순신 그리고 어찌되었던 간에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관점에서 조선에 개입한 명의 원군으로 비로소 전쟁의 국면을 바꾸게 된다. 물론 원군으로 전쟁에 참전한 명군의 수탈 역시 일본군의 그것과 많이 다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죽하면 명군은 참빗, 일본군은 얼레빗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활발하게 전개하며 보급선이 늘어진 일본군을 유격하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병참의 근간이 되는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함락시키기 위해 수륙병진한 일본 수군을 바다에서 무찌른 이순신의 활약이야말로 승부의 분수령이었다. 일본의 침략을 조공국인 조선에서 차단하겠다는 차원에서 참전한 명군은 오히려 부차적이었다고 할까. 그들의 원조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왜군 격퇴에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마냥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명군의 참전으로 평양과 개성 그리고 수도 한성을 차례로 수복하면서 전쟁은 일본이 주도하던 초기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전란으로 전 국토와 백성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가운데, 명군이 먹을 식량을 대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정승 유성룡을 비롯한 조선 조정의 노력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지도자들의 일상화된 당파 싸움과 무능력으로 전대미문의 위기가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검토해 본다면 그들이 명군에게 당한 수모는 어쩌면 자업자득일 지도 모르겠다.

 

<징비록>은 겨레의 성웅으로 일컬어지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전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미 무고로 일개 병사로 강등되었던 이순신 장군의 전력을 볼 때, 어쩌면 노량해렵이 자신의 마지막 무대라고 생각하고 갑옷을 입지 않고 출전했다는 야사가 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못난 임금 선조가 전쟁이 끝난 다음에 행한 행동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임홍빈 씨가 권말에서 인용한 월탄 선생의 소설 <임진왜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후대가 어떤 실수를 반복하는가에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다시 한 번 지난 잘못을 경계하여 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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