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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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라 호흡이 다르다. 어떤 책은 초반에 바로 몰입을 해서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손에서 책을 못 떼게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서서히 호흡을 가쁘게 만드는 책이 있다. 이번에 오랜 시간을 두고 읽은 이영훈 작가의 책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200쪽을 넘길 때까지 좀처럼 그가 추적하는 의붓아들 샘이 즐겨보는 특촬물에 대한 호기심이 일지 않았다고나 할까.

 

책표지를 장식하는 18번째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은 필연적으로 전작들과의 비교를 하게 만든다.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데뷔작으로 꼽는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첫머리에서 말했듯이 천명관 작가의 글 같은 그야말로 주술적인 매력은 없더라도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등장하는 주인공 영호에 대한 이야기는 자못 흥미진진하다. 일견 무미건조해 보이는 남다른 일상의 이야기라도 조금 참고 견디시라 그러면 정말 재밌는 이야기가 등장할테니.

 

보험사 직원으로 자신이 관리하던 암에 걸린 보험계약자와 덜컥 결혼해 버린 영호. 그가 사랑한다고 믿는 채연은 자신보다 8살 연상의 여인에다가 미국에 사는 아들도 하나 있다고 한다. 이거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하지만, 글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은 그런 이상한 관계가 아니라 이제 새아버지가 된 영호와 함께 살게 된 의붓아들 샘이 즐겨보는 특촬물 <체인지킹>, 우리말로 하면 아마 변신왕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이런 설정이라면 너무 단순하니, 그가 맡은 자해적 성격이 강한 보험 계약건도 하나 삽입되면 좋을 것이다. 그와 짝을 이뤄 보험사기꾼들을 잡아내는 전직 헌병 군무관 출신의 안도 나름대로 멋진 캐릭터다. 이제 모든 게 준비되었으니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순리일 것이다. 의붓아들 샘과의 소통불가로 일상의 스트레스를 하나 더 안게 된 영호는 예상대로 인터넷 카페의 도움을 받아 너무 유치해서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체인지킹>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주력한다. 어쩌면 그 과정을 통해 샘과 소통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을 안고서.

 

그 과정에서 얻어 터져 가면서 만난 민은 우리 어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특촬물의 세계에 대한 냉철한 분석으로 영호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처럼 특촬물이 세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산업을 넘어 거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조정하게 된 자본의 힘은 하찮아 보이는 유치한 특촬물의 세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계속해서 진화를 거듭하는 특촬물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특촬물을 소비하는 계층의 또래 아이들의 소비욕구를 자극하고, 신학기에 맞춰 새로운 상품을 시장에 내놓는다는 민의 분석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더 나아가 일만 하고 자식 세대와 도통 소통의 노력을 하지 않았던 아버지 세대와의 단절에 대해 민은 가혹할 정도의 비판을 마지않는다. 극복의 대상이 아닌 그야말로 무얼 해도 관심마저 가지지 않는 구조의 악순환은 영호의 파트너인 안의 가정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실재하지 않는 내러티브에서 좋은 아버지, 화목한 가정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 아들 세대를 대표하는 영호는 비로소 자신이 진심으로 샘을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영호의 깨달음이 소설 <체인지킹의 후예>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만 오면 그 다음부터는 영호가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비밀과 시너지를 불러일으키면서도 결말로 치닫기 시작한다.

 

어쩌면 <체인지킹의 후예>의 결말은 독자의 기대와 어긋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소설에서 그렇듯 문제제기의 과정과 전개는 저자가 맡을 진 몰라도 그 뒤의 결말의 해석은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에게 달려 있는게 아닐까. 특촬물이라는 유년시절 이후에는 감히 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궁진한 소재를 통해 세대 간의 단절 그리고 어른이면서 여전히 성장통을 겪는 이들에 대한 초상에서 이 신예작가에게 포인트를 주고 싶다.

 

그런데 정말 우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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