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프랑스 혁명 1 - 혁명의 영웅
사토 겐이치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역사를 전공했다. 대학 시절 수업 중에 원서강독이라는 수업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어로 된 원서를 공부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시절에 우릴 말도 못하게 괴롭혔던 책이 바로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였다. 한 학기 내내 그렇게 강도 높은 수업을 했지만, 얼마나 진도가 나갔는지 기억조차 희미하다. 그 뒤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에릭 홉스봄의 저작이 한글로 번역되어 세상의 빛을 보았고, 다시 도전했지만 보기 좋게 나가 떨어졌다. 아직도 집에는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가 내 머리맡 책꽂이 얌전하게 꽂혀있다.

 

책 이야기 하기에 앞서 왠 뜬금없는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 타령이냐고? 이제 이야기할 사토 겐이치 작가의 <소설 프랑스 혁명>의 큰 줄기인 프랑스대혁명의 시원을 에릭 홈스봄이 시원하게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홉스봄의 저작이 학술적인 차원에서 그가 이중혁명(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경제,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상징하는 자본주의 정치)으로 규정했다면 사토 겐이치는 좀 더 대중이 접하기 쉬운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223년 전에 벌어진 프랑스혁명에 접근한다. 모름지기 선택은 독자가 할지어다.

 

<소설 프랑스혁명>은 스위스 평민출신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가 혁명전야인 1789년 우유부단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만나 당면한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전국삼부회를 개최하고, 새로운 세금 제도와 그동안 세금 면제라는 시혜를 받았던 1신분(성직자)과 2신분(귀족)에 대한 과세 논의로 시작된다. 당연히 인원수에서 압도적인 3신분(평민)은 당연히 머릿수대로 의결권을 주장한다. 귀족 출신이지만, 용의 꼬리 되느니 차라리 닭의 머리가 되겠다는 신분을 초월한 발상으로 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진출한 미라보 백작이 프랑스혁명 초기의 주역으로 발군의 정치적 실력을 발휘하는 과정을 사토 겐이치는 세세하게 그린다.

 

가만 있자, 이거 작가 사토 겐이치가 일본 사람이 아니던가. 메이지 유신 이래, 서구 문물과 학문을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데 일가견을 보여줬던 일본 문화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었다. 문득 과연 프랑스혁명의 본고장인 프랑스 사람들이 보는 외국인이 쓴 “소설”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평가가 궁금해졌다.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사를 네덜란드 사람이 쓴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앞선다.

 

오랫동안 프랑스 혁명사를 쓰기 위해 준비했다는 일본 작가는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재정위기를 주된 이유를 쓸데없이 경쟁국 영국에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치른 미국을 지원한 프랑스 왕실의 간섭에서 찾는다.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이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지나친 낭비벽도 문제가 있었지만, 전비로 사용된 엄청난 재정지출과 1788년을 강타한 대기근과 그에 따른 식료품 부족으로 인한 물가폭등 등으로 프랑스 왕국의 대다수를 이루는 민중의 분노는 그야말로 임계점에 달해 있었다. 마르세유와 엑스를 비롯한 각지에서 벌어진 소요와 폭동은 왕국의 위기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왕국에 닥친 전대미문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앙시앵 레짐의 기득권 계층은 하는 수 없이 국왕 루이 16세가 수세 기만에 부활한 삼부회의 개최를 승일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시기에 호색한이지 방탕한 몰락귀족으로 집안에서조차 내침을 받은 미라보 백작이 프랑스 정치계에 등장해서 사자후를 과시한다. 평민 출신 삼부회원들은 회의 시작에서부터 특권 계급과는 다른 차별을 받는데, 진정한 평민 계급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는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각성이 굵직굵직한 사건의 전개와 더불어 진행되는 점을 눈여겨 볼만하다.

 

사토 겐이치의 논픽션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훗날 혁명이 자코뱅파의 무자비한 폭력과 숙청에 의해 공포정치로 치닫기 전까지 소위 혁명지도자들은 왕권신수설에 의거해서 국왕의 존재를 인정하고, 온건한 개혁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국왕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에 호소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는지 작가는 그 발단의 시원을 조목조목 독자에게 들려준다. 루이 16세도 자신이 의도했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바로 반동적인 조치를 통해 평민회의 의결을 무시하는 반동적 조치들을 서슴지 않는다.

 

한편, 탁월한 정치가였던 미라보 백작은 이 과정에서 1신분을 이루는 성직자 계급을 먼저 타겟으로 삼아 느슨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허무는 정치공작을 시작한다. 대중을 휘어잡는 선동은 말할 것도 없다. 훗날 미라보의 뒤를 이어 국민의회의 지도자로서 혁명의 기수로 등장하는 로베스피에르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제의 적과도 거리낌 없이 손을 잡는 정치의 비정한 현실을 배워 나가기 시작한다. 자, 목 끝까지 차오른 혁명의 뜨거운 기운은 과연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로마 역사를 이야기(게스타이)로 다뤘듯이, 사토 겐이치 역시 공식적인 역사의 큰 줄기에서 삐져 나온 부분에 자신이 공부하고 검토한 역사 이야기를 채워 놓는다. 말할 것도 없이, 요즘처럼 녹취가 존재하지 않는 당시의 미라보와 로베스피에르의 만남 대사는 모두 작가 상상력의 발로이다. 소설의 뒷면에 나오는 수많은 참고문헌이 보여주듯, 당시 상황을 바탕으로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라는 것이 바로 사토 겐이치의 목소리다. 그리고 당연히 작가의 주관이 배어 있을 것이다. 사토 겐이치가 과연 이 대하 시리즈를 통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책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혁명 지도자로 등장하는 미라보와 로베스피에르의 역할에 대해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여전히 프랑스혁명의 원동력이었던 계급적 차별에 대한 개인이 아닌 민중의 행동양식과 역할론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서술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거나 쁘띠 부르주아였던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각성과 계급적 자각이 모든 이들의 그것을 아우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제 겨우 한 권을 읽었을 뿐이다. <소설 프랑스혁명>이 모두 12권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끝나지 않은 혁명” 이야기의 시작치고는 출발이 괜찮은 것 같다.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에 다시 도전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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