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아말리아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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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 중에 문득 어느 책이 읽고 싶어졌을 때, 바로 그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이웃 블로거가 이 책을 먼저 읽었다는 글에 자극을 받았다.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사둔 파스칼 키냐르의 신간 <빌라 아말리아>를 골방에서 찾아냈다. 주인공 안 이덴의 이름이 그리고 자신의 남자친구 토마가 자기보다 훨씬 젊은 여자와 만나는 밀회 장소를 미행하다가 정말 우연하게 만난 오래전 친구 조르주 로엘(링거)의 이름이 우수수 지나간다.

 

키냐르의 책 <빌라 아말리아>에서 내러티브가 중요한 요소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소설의 행간 곳곳에 작가는 한 편의 시를 연상시키는 그런 문구들을 슬며시 삽입한다. 15년간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남자친구의 배신에 안은 괴로워하며 고통의 침잠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시나브로 이별의 수순을 밟기 시작한다. 토마는 부서진 관계를 회복하려 들지만, 안에게는 이미 과거형일 뿐이다.

 

브르타뉴 출신의 안은 현대음악 작곡가다. 그녀는 잘 다니던 음악출판사를 그만 두고,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던 집의 매매절차를 시작한다. 그리고 토마가 런던으로 출장간 사이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너무 오랜만에 만나 이제는 반말을 하기에도 부담스러운 그런 관계가 된 옛 친구 조르주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오랜 친구란 그런 걸까라는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원래 소극적이고 관계에 어설펐던 안은 모로코 마라케시로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독일,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 나폴리 만의 외딴섬 이스키아의 어느 빌라에서 마침내 자신이 갈구하던 평안과 안식을 찾는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안의 재력이다. 아무리 무언가를 하고 싶더라도, 그것을 현실화시킬 있는 돈이 없다면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니던가. 천국보다 낯설지만 천국 이상의 평안을 주던 이스키아 섬의 행복은 느닷없는 비극으로 끝난다. 설상가상으로 안의 유일한 의지처였던 조르주마저 죽어간다.

 

모두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된 <빌라 아말리아>에서 처음의 두 장은 안의 시선으로 그리고 세 번째 장은 안이 이스키아 섬에서 만난 샤를의 시선으로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다시 안의 시선으로 돌아온다. 갑자기 바뀌는 타자의 시선에 잠시 어리둥절해 하지만, 키냐르의 산문시 같은 글은 계속 전진한다. 어쩌면 타자의 감정이입을 거부하는 주인공 안처럼 그렇게 소설의 전개는 무미건조하기까지 하다. 주변을 관조하는 듯한, 사물에 대한 나열이 개인적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안에게 남동생의 죽음 때문에 어머니와 자신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는 남성 일반에 대한 불신으로 체화된다. <빌라 아말리아>에 나오는 관계의 총합이 지향하는 바가 궁극적으로 어디로 도달하게 될지 슬쩍 징조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그래서였을까? 여자와 여자(안과 아말리아 혹은 안과 줄리아), 여자와 아이(안과 레나)의 부유하는 관계 같은 스멀거리는 유대감이 얼핏 스쳐간다. 철저한 고독을 원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위기의 순간에 의지할 사람을 간구하는 현대인의 이율배반적이면서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고통의 근원을 파스칼 키냐르는 예리하게 해부한다. 소설의 중심축 역할을 하는 키냐르 특유의 타자화된 시선의 묘사 역시 일품이다. ‘괴로움이 일종의 고통스러운 길목’(38)이라거나 가정은 정원 한가운데서 불타고”(99) 표현은 가히 최고였다.

 

2006년에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된 <빌라 아말리아>는 브누와 쟉꼬 감독 연출, 이자벨 위페르 그리고 장-위그 앙글라드 주연의 영화로 소설 속의 빌라 아말리아가 위치한 이스키아 섬 로케이션으로 진행됐다.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가장 궁금했던 안의 아지트 빌라 아말리아는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아쉽게도 불어를 하지 못하는지라,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영화 <베티 블루>의 장-위그 앙글라드는 조르주 역에 안성맞춤인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읽은 파스칼 키냐르의 <빌라 아말리아>는 참으로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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