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상페
장 자크 상뻬 지음, 허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연전에 고양 아람누리에서 열린 장 자크 상뻬전을 찾았다. 당분간 상뻬의 원화가 해외 나들이를 할 계획이 없다는 전언에 마음이 분주해졌다. 전시회장에 넘실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관람이 생각보다 쉽진 않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한국의 꼬마 니콜라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해지기도 했다. 더 한참 전에는 두 번째로 들린 파리에서 상뻬의 그림엽서를 사기 위해 가판을 기웃거리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리고 보니 상뻬에 얽힌 추억이 제법 된다 싶었다.

 

이번에 미메시스에서 출간된 <뉴욕의 상뻬>는 프랑스 보르도 출신의 에일리언(이방인) 장 자크 상뻬가 1978년부터 인연을 맺어온 뉴욕의 저명한 잡지 <뉴요커>에 그린 표지 그림들을 담은 제법 두툼한 책이다. ‘밀레니엄 캐피탈이라는 별명을 가진 대도시 뉴욕에 처음 발을 내딛는 순간, 프랑스 촌놈 상뻬는 정말 어리둥절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프랑스 본토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상뻬는 뉴요커들이 삶을 각축을 벌이는 현장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자신만의 화법으로 한 편의 논문에 버금가는 멋진 그림들을 그의 팬과 <뉴요커>의 독자들에게 선사해 주기 시작했다.

 

엄청난 규모와 다양한 삶의 면면을 자랑하는 뉴욕은 분명 상뻬에게 좋은 소재였음에 틀림없다. 그의 일러스트는 뉴욕의 거의 모든 장소와 인간군상의 양태를 거침없이 망라한다. 한 장 한 장 정성스레 인쇄된 그의 채색 일러스트를 보자니 문득 전시회에서 본 파리 시내에 차를 주차하던 장면을 포착한 그림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어쩌면 상뻬가 스케치하는 찰나의 미학이야말로 상뻬 예술의 정수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이 곧바로 뒤따른다.

 

개인적으로 딱히 좋아하는 도시는 아니지만, 수백만의 인파가 몰려가고, 몰려오는 뉴욕의 번잡한 시내에서 유유하게 자전거에 요리에 사용할 재료를 싣고 달리는 요리사의 모습에서, 때로는 이제 막 무대에 오르려는 흥분과 긴장을 가득한 발레리나들의 모습에서, 한창 협주 중에 오케스트라에서 슬며시 빠져 나와 막간에 담배를 피우는 트롬본 연주자의 모습에서 나는 모름지기 아티스트는 이런 순정한 삶의 장면들을 잡아내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상뻬가 시전하는 수많은 대중 속에서 특정한 개인의 특별함을 꼭 집어내는 아티스트 특유의 감각에 독자는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보면 볼수록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상뻬의 그림에는 촌철살인의 미학뿐만 아니라 예술적 상대성 또한 빠지지 않는다. 새를 관찰하기 위해 카누를 타고 나선 커플을 오히려 무성한 숲 속에 군락을 이룬 새들이 구경하는 그림은 정말 압권이었다. 투르 드 프랑스를 연상시키는 자전거 랠리에서도 모두가 기를 쓰고 앞으로 질주하는 가운데, 나홀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는 캐릭터에 대한 묘사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녹지로도 유명한 뉴욕의 공원에서 건강 증진을 위해 달리고 있는 이들을 넋 놓고 바라보는 커플에게 경찰이 조크를 던지는 장면도 숨 가쁜 삶을 소비하는 뉴요커들의 일상으로 치환된다.

 

거창하게 상뻬의 그림을 보면서 철학을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래도 책머리에 등장하는 지인의 말처럼 상뻬의 그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풍성한 여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여러 번 곱씹어 봐야할 것 같다. 자고로 백문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했다. 종래의 상뻬 팬, 뉴욕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여백의 아름다움에 한걸음 다가서고 싶은 이들이라면 일별(一瞥)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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