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크박스의 철학-히트곡 엑스쿨투라 2
페테르 센디 지음, 고혜선.윤철기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주크박스와 관련된 개인적 일화를 하나 소개하겠다. 오래전 자주 들르던 맥줏집이 하나 있었다. 좋아하는 야구 경기를 매일 저녁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맥주 값이 싸서 자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석에 있던 요상한 기계와 만났다. 말로만 듣던 주크박스였다. 바텐더에게 잔돈을 바꿔다가 알파벳과 숫자 조합으로 된 좋아하는 곡을 듣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이제는 어디 가도 볼 수 없는 사라진 공룡 같은 존재였다고 해야 할까. 신기한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인 프린스의 을 꾹꾹 눌러서 듣고 있는데, 주인장이 그 노래가 마음에 안 드는지 홱 바꿔 버리는 게 아닌가. 주크박스와 관련된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다.

 

문학동네에서 엑스쿨투라라는 새로운 인문서적 시리즈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페테르 센디의 <주크박스의 철학-히트곡>은 거리의 상가에서 그리고 이동하는 대중교통 수단에서 곁에 선 이의 아이폰에서 무시로 들을 수 있는 “히트곡”(tube)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시도한다. 그렇지 않아도, 케이팝이 휩쓸고 있는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팬으로 고급예술이라기보다는 하위문화로 취급받는 대중음악에 대한 철학자이자 전문 음악이론가의 연구가 내심 반가웠다.

 

서론에서 페테르 센디는 히트곡에는 우리의 귀에 착 달라붙는 ‘귀벌레’ 같은 바이러스가 있으며 동시에 일종의 철학적 존엄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맙소사! 시작부터 예상을 뛰어 넘는다. 히트곡의 개념과 논리를 규명하기 위해 진부함과 특이함이라는 요소를 도입하기도 한다. 한편, 프랑스 출신의 이 철학자는 대중음악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입장을 견지한다. 마르크스의 사유를 빌어 센디는 인간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물신성과 비의성(秘義性)을 가진 ‘사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히트곡을 “대중예술과 키치”의 영역 속으로 내몬다.

 

한편, 페테르 센디에 앞서 대중음악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가한 이가 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몇 세대 전에 이미 우리가 현재 대량생산되어 어디서나 즐기고 있는 케이팝의 전위대이자 롤모델 소녀시대의 훅송으로 변신한 후렴구의 비의성에 철학적 담론을 덧씌운다. 아티스트가 아닌 엔터테이너로 거대자본과 기획으로 양성된 케이팝 아이돌 가수의 히트곡에는 페테르 센디가 언급하는 ‘영혼’(pysche)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우리는 저렴하고 얼마든지 복제와 대체가 가능한 자본예술의 힘으로 만들어진 ‘키치’스러운 음악에 포위되어 있지 않은가.

 

작가는 정신분석학의 알레고리를 이용해서 대중가요 히트곡의 본질을 분석한다. 히트곡에 담긴 ‘말’의 이면에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구현과 갈망이라는 서로 상충하는 그야말로 탄탈로스의 목마름이 있다고 페테르 센디는 쓰고 있다. 그가 실례로 든 <말, 말, 말>의 달리다와 알랭 들롱 버전을 들으니, 거의 강박 수준으로 변조된 반복 서사의 위력을 곧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기표와 기의로 경이롭게 교차하는 “말”(parole)이 그전 그런 멜로디 위에서 펼치는 언어의 향연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작가가 시도하는 히트곡(tube)의 외연 확대는 음악 자체뿐만 아니라, 키르케고르의 대중극(솔직히 이 부분의 변주와 반복에 대한 작가의 서술은 이해하기 정말 어렵다)과 영화에까지 도달한다. 프리츠 랑 감독의 전설적인 명화 에 등장하는 <페르귄트>의 운명적인 곡조는 물론이고 알랭 레네 감독의 <우리는 그 노래를 알고 있다>까지. 그야말로 키치스러운 “그저 그런 곡조”에 포위되어 쾌락적 소비에 탐닉하는 대중의 현실계 재현이라고 부르고 싶다.

 

지난주에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 친구는 나에 대한 추억의 일성으로 크리스 드버그의 “The Lady in Red”를 꼽았다. 학업에 찌들려 있던 그 시절, 크리스 드버그의 그 노래는 그야말로 귀벌레처럼 나의 귀에 기생하고 있었나 보다. 누군가에게 내 내밀한 자아의 한 부분이 대중음악이라는 진부함을 관통해서 특이함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소리 바이러스를 간직한 채 우리는 오늘도 스산한 도시의 밤거리를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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