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역시 장르 소설은 읽는 재미가 있다. 플롯에 푹 빠져 읽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기리노 나쓰오 작가 신작 <로즈 가든>도 마찬가지였다. <로즈 가든>은 ‘무라노 미로’ 시리즈의 외전(外傳) 격이라고나 할까. 유년 시절 미로와 미래의 그녀의 남편이 되는 히로오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사실 인도네시아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미로의 남편 이야기는 기억의 창고 저 너머에 아스라하게 새겨져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인스톨인 <로즈 가든>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영업 사원으로 맹활약 중인 히로오라는 이름과 시리즈의 주인공 미로가 결합하자 바로 번쩍이는 기억의 화학 반응을 이끌어냈다. 아 그랬구나, 히로오는 미로라는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갔구나. 아니 그 반대였나? 뭐 상관없다.

한 때 연상의 여자가 진짜 여자라고 생각하던 히로오는 어느 날 동급생인 미로와 만나 같이 땡땡이를 치면서 파멸의 전주곡을 시작한다. 현재와 과거의 연결점을 넘나드는 구성이 참신하게 다가오며, 미로가 친 덫에 빠져 이제는 변태 소녀킬러(물론 연쇄살인범의 그 “킬러”는 아니다)로 바뀐 자신을 탓하는 장면도 빠지지 않는다. 너무 성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이 나오는지라 이 소설은 어쩌면 19금으로 분류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외전을 통해 미로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던 과거의 속살을 기리노 나쓰오 작가는 헤집는다.

첫 번째 인스톨이 과거의 회상이었다면 나머지 세 이야기는 무라노 미로의 활약이다. 귀신잡기라는 소재를 다룬 <표류하는 영혼>는 그냥 그랬다. 맨 마지막의 SM 클럽에서 여신으로 활약하던 메구미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하는 인스톨은 아무래도 일상에서 많이 벗어난 이야기라 그런지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다. 그렇다, 이 소설집에서 내가 가장 추천하고 싶은 인스톨은 바로 <혼자 두지 말아요>다.

남편과 사별하고 삼십대 초반에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탐정으로 활약하는 무라노 미로는 참 용감하다. 어떤 일은 아무리 보수가 좋아도 선뜻 나서지 않지만, 또 어떤 사건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으로 끝까지 성실하게 수행하기도 한다. <혼자 두지 말아요>는 상하이 클럽에서 일하는 유미라는 중국 베이징 출신의 절세미인을 사랑하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어느 남자의 이야기다.

기리노 나쓰오는 일단 치자꽃 같은 얼굴을 한 어떤 남자라도 한 번 보면 넋이 나가는 그런 절세미인을 등장시킨다. 집중과 선택이라는 소설 작법의 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미로가 이미 맡고 있는 불륜사건에 미야시타라는 남자가 의뢰한 자신이 사랑하는 유미의 마음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중첩시킨다. 물론, 그런 사적 감정에 대한 판단은 아무리 유능한 명탐정이라도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정중하게 거절한다. 하지만 미야시타가 날카로운 칼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에 미로는 아마도 억울하게 죽었을 미야시타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이웃에 사는 호모 도조 씨에 대한 야릇한 감정도 빠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탐정이라는 생리상 남자의 역할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미로는 주저 하지 않고 이 든든한 사내의 힘을 빌린다. 상하이 클럽에 침투할 적에도 여자 혼자 가기에 뭣하니 바로 이 도모 씨를 동원한다. 아마 현실세계에서라면 쉽지 않을 텐데 소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정체불명의 유미라는 전형적 팜므 파탈의 등장, 살인사건의 발생 그리고 미스터리까지 적절하게 결합된 느와르를 방불케 하는 현란한 인스톨이 너무나 매혹적이다.

소설의 곳곳에 심어둔 복선과 암시의 부비트랩을 너무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다 보니 나의 의식 세계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기리노 나쓰오 작가가 독자를 위해 준비한 힌트는 보지 못한 채, 엉뚱한 것에만 한눈을 팔았나 보다. 아주 간단한 트릭도 잡아내지 못하면서 너무 큰 스케일의 상상이 문제였다. 아니 어쩌면 그런 엉뚱한 상상 때문에 더 재밌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독도 또한 독서의 즐거움이 아니던가.

참, 그런데 표지와 챕터마다 등장하는 이 얼룩말 녀석의 정체는 뭘까?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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