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레터
틸만 람슈테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틸만 람슈테트?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그전에 먼저, 독일작가와 나는 아무래도 궁합이 맞질 않는 모양이다. 일전에도 카챠 랑게-뮐러라는 독일 작가의 <차마 그 사랑을>, 얼마 전에 읽었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 그리고 잔뜩 기대를 했던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 이르기까지 기대했던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소설을 읽을 적에 무언가 감칠맛이 나는 그런 쏠쏠한 재미를 원하는데, 아무래도 독일 작가의 글은 나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2008년 잉게보르크 바흐만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책 띠지의 소개와 책 표지의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한 마술사(?)의 유쾌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레터>는 시종일관 어떤 죽음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키스 슈타페르페니히는 항상 중국 타령을 하던 할아버지가 오스트리아도 아닌 독일에서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에게 보내는 중국발 가짜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키스가 들려주는 할아버지는 참 특이한 캐릭터다. 수도 없이 할머니를 바꾸는 바람둥이에다, 손자들을 운전사로 부려 먹기 위해 브레이크에 발이 닿을 만한 나이가 되면서부터 운전교습을 시킨 엽기적인 노인네다. 하긴,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인 키스 역시 할아버지의 젊은 ‘할머니’ 프란치스카와 눈이 맞아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하고 결혼까지 결심한다. 자신을 스스로 인생의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키스는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소원인 중국 여행을 위해 모아준 돈을 프란치스카와 함께 카지노에서 한방에 날려 버리는 대담함도 보여준다. 왜 갑자기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이 떠오르는 걸까? 가족의 해체는 우리나라나 독일이나 비슷하게 진행되는 모양이다. 다만 한 가지 차이라면 독일판 콩가루 패밀리는 좀 더 파격적이라는 점 정도?
 
<베이징 레터>는 실제 독일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키스가 할아버지와 중국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쓴 가짜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전자도 그렇지만 후자는 더욱 더 철저하게 허구다. 아무리 허구라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 책인 <론니 플래닛>을 잘 연구하고 써서 그런지 마치 현재 중국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마 그런 게 작가의 역량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현실세계에서는 돈을 다 날려 버린 키스가 중국행을 닦달하는 할아버지를 무마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이 아주 리얼하게 그려진다. 한편, 베이징과 시안을 거치는 여행을 하는 편지 부분은 서구인의 눈에 비친 이국적인 풍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중국을 그린다. 만리장성 투어를 마치고는, 돌팔이 한의사에게 약을 한 첩 짓기도 하고, 국수를 주문한 식당에서는 어디선가 나타난 할아범의 젓가락질로 사이좋게 국수 한 그릇을 싹 비우기도 한다.
 
다음 목적지인 시안에서는 드디어 할아버지는 자신이 그렇게 중국에 오고 싶어 한 이유를 살짝 드러내 보인다. 아주 오래 전, 만났던 ‘월드 센세이션’ 리안의 이야기가 중심으로 떠오른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간직하고 싶은 청춘의 아련한 사랑 이야기. 현실에서는 할아버지 카를의 죽음으로 비롯된 신원 확인 절차가 진행 중인 가운데, 키스는 베르터발트에서 확인한 할아버지의 시신을 보고서도 부인한다. 어느 순간, 현실과 허구가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에라, 모르겠다 어디 한 번 끝까지 읽어 보자!
 
<베이징 레터>는 아쉽게도 다 읽고 나서도, 헛헛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카를 할아버지의 좌충우돌 중국 여행기는 재밌었지만 현실 세계에서 허물어진 가족관계의 복원은 요원하게만 다가왔다. 그런 게 바로 새로운 밀레니엄 통일시대 독일의 현재 모습일까? 차라리 현재의 이야기를 쏙 빼 버리고 중국여행만으로 책을 구성했으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힌 서구인들의 사고와 왜곡이 얼핏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요즘 마르틴 발저의 책들이 땡기는데, 과연 독일 작가의 책은 지루하다는 개인적 편견을 깰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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