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토성의 고리>는 독일 출신 영국 작가 W.G. 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가 자신이 영국으로 이주해서 20년 이상 산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을 도보로 여행하면서 쓴 소설이다. 허구와 역사적 사실을 잘 배합하기로 유명한 W.G.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야사로 다루어질 법한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 있다.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면 정말 리얼리티에 충실한 것 같으면서도, 어느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는 작가의 유려한 픽션을 발하기도 하니 말이다. 어느 것을 취해도 꽃놀이패라는 느낌이 드는 책이다.

W.G. 제발트의 글을 읽으면서 역시 문인은 역사는 물론이고 사회, 경제는 물론이고 다방면에 능통해야겠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문인이 책을 읽은 그의 작품은 풍성해진다고 믿고 싶다. 영국 써퍽 지방을 위시한 여러 지방을 유람하면서 작가가 보고 느낀 점에 대한 연관적 분석은 정말 탁월하다.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전 세계를 호령하던 대영제국 성립의 결정적 계기였던 “쏠 베이 해전”을 필두로 해서 가문에서 가문으로 이어지는 영국 내에 산재한 고성의 유래와 해당 가문에 대한 이야기에 귀가 절로 솔깃해진다.

로우스토프트를 배경으로 한 청어 잡이에 대해서도 W.G. 제발트의 예리한 시선은 멈추지 않는다. 작가는 지난 세기 청어는 “근본적인 절멸 불가능성”의 상징이었다고 적는다. 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독성물질로 인한 환경오염 앞에 어떤 것도 무한하지 않다. 이런 도거 뱅크의 청어 잡이와 2차 세계대전에서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해방시킨 르 스트레인지 소령의 침묵은 기묘한 공명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인류의 양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 홀로코스트의 비극 앞에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인류 문명은 ‘연소’라는 과정을 통한 소멸로 치닫고 있다는 경고일까?

중국 청나라로 갔어야 할 기차를 보면서 부패와 독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가던 제국의 흔적을 좇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영국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었던 <아편전쟁>으로 만성적 무역적자에서 단박에 벗어나 새로운 상품시장을 개척한 제국주의의 실체를 고발한다. 한편, 황위계승의 기존질서를 부정하며 오직 권력만을 추구하던 서태후의 탐욕으로 한 때 세계 최강의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물론, 청제국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태평천국의 난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라는 대외적인 요소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저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잣는 누에야말로 이상적인 백성으로 본 위정자의 오만에도 일침을 가한다.

조국 폴란드를 떠나 영국에서 작가 활동을 만개했던 조셉 콘래드의 콩고 기행과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책에도 등장하는 로저 케이스먼트의 비교도 빼놓을 수 없다. 망명객으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 활동을 했던 콘래드는 벨기에 레오폴드 왕의 사유지였던 식민지 콩고의 실상과 식민제국주의자들의 범죄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W.G. 제발트는 서구인들이 당시 지도상에 백지로 나와 있던 미개척지를 어떻게 파괴해 나갔는지 담담한 어조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W.G. 제발트는 영국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에 대한 광폭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 고대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겠다는 일념으로 생업마저 포기하고 매달린 알렉 제럴드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무수한 시간에 걸친 연구와 노동이 필요한 이 프로젝트를 묵묵하게 수행하는 은퇴한 농부에게 작가는 경의를 표하기도 한다. 1975년 네덜란드 느릅나무 병과 1987년 전대미문의 폭풍으로 쑥대밭이 된 소소한 역사적 사실도 빠지지 않는다.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졸부들이 토지와 대저택을 경쟁적으로 구입하고 어떤 경제적 효용도 없는 파괴적 사냥에 몰두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와 협력해서 수많은 죄없는 사람을 학살한 크로아티아 의용군 우스타샤의 만행과 이들의 문서작업을 도운 이가 바로 전 UN 사무총장이자 오스트리아 대통령 쿠르트 발트하임이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작가는 문명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파괴의 역사였노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마지막 장에서 고래도 국가적 차원에서 비단 제작과정을 비밀에 부쳤던 중국의 엄중한 감시를 뚫고, 서방으로 누에를 반입하는데 성공한 후에도 양잠업이 서구 사회에 뿌리 내리기까지 유구한 시간이 걸렸다는 점도 무척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그리스, 이탈리아 그리고 프랑스를 거쳐 서유럽에 전파된 양잠업이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에서는 어떻게 해서 실패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다시 세기를 뛰어넘어 나치 완벽주의자의 시도에까지 도달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놀랐다. 역사와 자연과학적 사실 그리고 정치의 조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W.G. 제발트의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토성의 고리>에서 W.G. 제발트의 지성과 학식에 비해 턱도 없는 실력으로는 어디까지나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 솔직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잘 모른다고 해서‘ 이건 모두 소설이야’라고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다만 아쉬운 건 우리에게 4편의 작품만을 남겨 놓고 영면의 세계로 간 작가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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