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비운의 지식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역사를 읽었다. 세계 3대 전기 작가라 불리는 작가는 머리말을 통해 이 책에서 역사의 “별 같은 순간들”을 담아내려고 했고, 역사 스스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순간에 일개 역사가가 각색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하나의 역사가 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주관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츠바이크는 그렇게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오롯하게 평가는 글을 읽는 독자에게 넘기는 수완을 발휘한다.

모두 12개의 역사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시작은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한 마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이다. 천 년 동안 서방 기독교 제국의 방파제로 작용해온 비잔틴 제국은 이제 수도만 남은 제국으로 마지막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한편, 욱일승천하는 기세의 오스만 제국의 젊은 지도자 마흐메트에게 비잔틴 제국의 보석 콘스탄티노플은 반드시 점령해야할 필생의 사업이었다. 모든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노력으로, 마흐메트는 엄청난 크기의 청동 대포와 자그마치 1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선다.

입술이 다치면 이가 시린다[脣亡齒寒]는 교훈을 몰랐던 서방의 기독교 국가들은 오스만의 침략에 맞서 지원을 요청하는 비잔틴 황제의 호소에 눈을 감는다. 제국 간의 영토분쟁, 동서교회의 분리 이래 로마 교황과 동방정교회 장로간의 불화는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 다음은 서방 제국 차례라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몰랐을까? 콘스탄티노플이 마흐메트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난 뒤, 서방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비엔나가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위되고서야 가공할 만한 술탄의 힘을 느꼈으리라.

프랑스 혁명 전쟁 기간에 만들어진 루제 드 릴이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는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프랑스 혁명의 전파를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앞두고, 스트라스부르 시장의 제안으로 급조된 노래가 프랑스 혁명 대의의 상징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됐다. 자유와 평등, 박애 그리고 자신의 조국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나선 시민군에게 루제가 만든 곡보다 더 어울리는 노래는 없을 것 같다. 비록 훗날 루제는 혁명에 염증을 내고, 반혁명주의자로 돌아섰지만 그가 만든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국가로 삼색기가 펄럭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고 여전히 애창되고 있다.

19세기 유럽 아니 세계의 운명을 뒤바꾼 단 1초의 결정이 제시된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였던 워털루 역시 세계사의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다. 벨기에의 워털루 언덕에 포진한 영국의 웰링턴을 격파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자신의 천재적인 전략과 위대한 프랑스 군대를 아낌없이 투입한다. 문제는 영국을 지원할 블뤼허 장군의 프로이센군을 전장에서 떼어 놓을 목적으로 파견된 그루쉬 원수의 결정이었다. 워털루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서둘러서 황제를 도우러 주전장으로 이동하자는 소장파 장교의 의견을 무시하고 황제가 내린 명령에만 집착한 그루쉬 원수가 내린 1초의 결정으로 결국 나폴레옹은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지만, 그가 만약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는 대신, 나폴레옹을 도우러 전장으로 뛰어들었다면 세계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다.

20세기 마지막 남은 인류의 처녀지 남극으로 향했던 영국 출신 로버트 스콧 탐험대의 위대한 실패 역시 인상적이었다. 최근에 읽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의 <빙하와 어둠의 공포>에서 읽었듯이, 고립무원의 추위 속에 보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강력한 경쟁자(아문센)에 앞서 남극에 조국의 ‘유니언 잭’을 꽂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고난과 역경을 딛고 마침내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스콧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건 선착한 아문센의 편지와 노르웨이 국기였다. 그들이 무사히 귀환했다면, 그나마 해피엔딩이겠지만 그러지 못하고 모두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동사하고 만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꿈을 가지고 불가능한 꿈에 도전했는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에까지 사랑하는 가족에게 남긴 편지와 처절하게 남긴 기록을 통해 인류의 위대한 도전정신을 되새긴다.

마지막 주자로는 “세상을 경악케 한 열흘”의 주인공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 우리에게는 레닌이라는 더 잘 알려진 혁명가에 대한 이야기다. 제정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스위스 도서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파던 독서가 레닌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조국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귀국을 서두른다. 하지만, 차르의 전제정치에 반란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은 탁월한 선동가이자, 혁명가인 레닌의 귀국을 원하지 않는다. 아직 휴전이 발효되지 않은 상황에서 적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거치지 않고 러시아로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조국의 배신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독일 측과 개인 자격으로 타협한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를 타고 마침내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혁명에 도화선을 당긴다. 이렇게 러시아의 심장부로 날아간 혁명의 탄알은 착취와 억압으로 얼룩진 ‘시간의 질서’에 균열을 가했다. 당시 레닌의 결정은 목적적 인간의 지향성에 대한 뚜렷한 본보기였다.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저자 츠바이크는 세계의 운명을 바꾼 역사의 별 같은 순간들에 주목한다. 콘스탄티노플의 그 유명한 삼중벽을 무용지물로 만든 “케르카포르타”가 튼튼하게 방비되었더라면, 워털루에서 그루쉬 원수가 1초의 결정을 재고했다면, 레닌이 조국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 속의 작은 실수나 오판이 역사적 사건의 단초가 되었던 것처럼, 어쩌면 역사의 큰 흐름은 이미 정해져 있던 게 아닐까? 역사의 가정은 그저 분석과 인과관계의 설정을 좋아하는 후세 사람들이 부질없는 상상의 소산일지도 모르겠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대로 역사의 별 같은 순간들을 즐기시라, 역사에 각색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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