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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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책을 샀는데, 하룻저녁에 다 읽어 버렸다. 그만큼 흡입력이 있다는 말일 게다. 2년 전, 너무 오른쪽으로 간 게 아닌가 싶었는데 <낯익은 세상>으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오고 있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작 <강남몽>에 실망이 커서 그랬는진 몰라도 기대를 뺀 게 주효했을까. 따라지 인생이 판치는 꽃섬에 사는 인간 군상에 대한 서사에 흠뻑 빠져 버렸다.

주인공 딱부리는 올해 열네 살이다. 아버지는 교육대로 끌려가 부재중이고, 딱부리는 산동네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엄마와 함께 살다가 아수라 삼촌을 따라 꽃섬에 입성한다. 이제 본격적인 소설의 무대가 될 꽃섬에서 그를 반겨주는 건 쓰레깃더미와 절로 코를 쥐어 싸게 만드는 악취다. 나보코프가 즐겨 쓴 공감각적 이미지의 중첩이 소설의 서두를 장식한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제 그들의 생활의 터전이 될 쓰레기 유치장에서 자재를 골라내 얼기설기 오두막을 짓는다.

아수라 아저씨의 빽으로 쓰레기 투기장 일선에 배치된 엄마를 따라 딱부리는 또래보다 훨씬 큰 덩치에 특유의 깡다구로 바로 쓰레기 분류 작업에 투입된다. 타인에 의해 폐기된 물건은 이들 쓰레기 수집꾼에 의해 철저하게 분류되고, 재생(再生)의 순간을 맞이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꽃섬, 샛강말 그리고 도회지 사람의 분류처럼 쓰레기에도 등급이 있다. 중산층 가정이나 미군부대에서 나온 쓰레기가 왔다란다.

꽃섬에 버려진 쓰레깃더미처럼 딱부리는 자신도 다른 이에 의해 유기(遺棄)된 게 아닐까 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이렇게 청소년 딱부리가 느끼는 소외(isolation)의 감정은 우리 사회에서 작금에 진행 중인 다양한 소외의 원형이다. 점차 공고화되는 경제력에 의한 보이지 않는 계급화는 꽃섬 사람들에 대한 외부인의 살벌한 시선으로 치환된다. 쓰레기에 묻혀 사는 꽃섬 사람들에게서 나는 악취는 주홍글씨처럼 그들을 따라다닌다. 땜통과 김서방네 막내의 도움으로 횡재한 딱부리가 도시에 나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악취와 거렁뱅이 표식처럼 달라붙은 주워 입은 의복을 바꾸는 것이다. 그들은 타인과 어울려 살기를 원하지만 어떤 물적 토대도 없는 그들을 사회는 매몰차게 거부한다.

이런 사회 구조적 모순의 경계에 작가는 땜통을 통해 꽃섬의 원주민인 김서방네 식구를 슬쩍 등장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이승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진짜 엄마는 도망가고, 아버지인 아수라와도 데면데면한 땜통은 신내림을 받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빼빼엄마를 딱부리에게 소개해 준다. 이놈의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정상적 삶의 궤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걸까. 어쨌든 김서방네 막내가 메밀묵 타령을 하자 딱부리네는 추석을 맞아 정성껏 준비해서 그들을 위로한다. 작가는 왜 생뚱맞게 귀신 이야기를 집어넣었을까? 사회비판 소설에 판타지적 요소가 나오니 당혹스럽다.

추석 즈음에 나서 종교단체의 배급과 이어지는 사진 촬영은 지난 세기, 오지의 밀림을 방문한 선교사들의 그것과 다름없다는 묘사는 정말 일품이었다. 딱부리와 땜통은 영혼의 구원보다는 육신의 허기를 채우기에 급급하고, 전리품처럼 그들이 나눠준 송편과 라면상자를 옆구리에 낀 그네들의 모습은 처연하다. 발할라의 신전에서 파견한 헬리콥터는 꽃섬에 기생하는 파리와 모기를 소탕하기 위해 무시로 소독약을 뿌려댄다. 좋다고 헬리콥터를 쫓은 아이들에게 발할라 전사는 “니들도 소독되구 싶”냐고 호통을 내지른다. 그들에게 꽃섬 사람들은 파리나 모기 같은 존재라는 말일까.

아수라 아저씨의 막장드라마식 칼부림으로 소설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귀신의 도움으로 횡재한 딱부리는 땜통을 데리고 도시 나들이에 나선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맘모니즘에 물든 현실이 가감 없이 그려진다. 꽃섬이 딱부리와 땜통에게 생존의 공간이었다면, 역설적으로 꽃섬과 대척점에 서 있는 도시는 온전한 소비와 쾌락의 공간이다. 작가가 전작 <강남몽>에서 ‘강남’이라는 특정 공간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다면, <낯익은 세상>에서는 실재하면서도 허구적인 ‘꽃섬’으로 공간이동을 시도한다. 비교 극과 극 체험이라고 해야 할까? 극락과 나락을 오가는 공간의 선택이 독자는 당혹스럽다.

소설에 꽃섬 사람들의 미래에 대해 어떤 언급도 없는 게 아쉽다. 대략 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꽃섬에 둥지를 틀게 되었는지 과거는 유추해 볼 수 있지만, 불투명한 미래는 갑작스러운 화재와 함께 밤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창대한 시작과 전개와 비교하면 결말은 상대적으로 힘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물론, 문학이 작금의 현실을 반영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해피엔딩도 어울리지 않긴 매한가지다. 아무리 딱부리네가 귀신의 도움으로 횡재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에 나가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식의 결말은 아슬아슬하게 버텨온 현실을 배반하는 설정일 테니 말이다.

살면서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공간에 대한 낯선 초대장은 만족스러웠다. 그런 공간을 담보로 해서 얻어낸 결과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곰곰이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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