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을 모셨지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예전에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았는데 그동안 인연이 안돼서 못 읽고 있다가 어제서야 읽게 됐다. 헌책방에 들러서 서가에 꽂혀 있는 녀석을 보고는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집어 들었다. 체코 출신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영국 왕을 모셨지>, 제목부터 호감이 간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배경부터 시작해서 주인공 디테라는 캐릭터 다 마음에 든다.

우리의 주인공 디테는 15세 소년이다. 체코의 프라하 호텔에서 수습 웨이터로 사회에 첫발을 디딘 디테는 인격이 아니라 돈이 모든 것을 말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정수를 목격한다. 천국 같은 라이스키 창녀촌에 출입하기 위해 디테는 어렵게 핫도그를 팔고, 손님들이 건네주는 팁을 받아 돈을 마련한다. 이거 어린 녀석이 이거! 한편, 디테는 부자들의 허위와 위선이 거래되는 호텔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말라는 교육을 받는다. 피를 튀기는 집시들의 난동이 호텔에서 벌어져도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안정을 추구하는 호텔에서의 삶에 디테는 매료된다. 이 책이 쓰인 1970년대 초반 공산주의 체코의 시대상을 반영하듯, 격동의 프라하의 봄을 보낸 이들에게 보내는 오마주로 읽힌다.

라이스키 출입이 빈번해지면서 이 꼬마는 독창적인 아가씨를 꼬시는 법까지 개발해낸다. 호텔 생활을 통해 배운 직관과 관찰이 유용하게 쓰인다. 세일즈맨으로부터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까지 통달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직장을 옮기게 된다. 호텔이 부자들의 욕망 배출구라는 점은 첫 직장에서 이미 알았지만, 전직하면서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행동도 돈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디테.

디테는 자신이 일하게 된 세 번째 호텔 파리에서 비로소 임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영국 왕을 모셨다는 서비스의 달인 스크르지바네크 지배인을 만나면서, 디테는 본격적인 서비스에 눈을 뜨게 된다. 그렇다, 강호에는 언제나 고수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제까지 수습 기간이었다면 영국 왕을 모신 지배인은 역시 범인과 다른 아우라를 내보인다. 겉모습만으로도 손님이 어떤 음식을 원하고, 어디 출신인지를 단박에 파악해내는 탁월한 능력에 어린 디테는 번번이 내기에 지면서도 그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디테에게도 기회가 왔다. 아비시나아 황제를 봉사하란다!. 자존심 강한 호텔 주방장을 몰아낸 황제의 요리사들이 동물원에서 영양을 사들이고, 산 낙타를 호텔 정원에서 도살해서 요리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가히 이 소설의 압권이다. 진짜 소설에나 등장하지 싶을 정도로 유쾌한 이야기다. 자, 이제 어린 꼬마 디테도 왕년에 황제를 모셨었지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전반전을 꼬마 디테가 성장해가는 멋진 호텔리어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렸다면, 후반전에서는 보후밀 흐라발 작가는 영욕의 체코 현대사를 은근슬쩍 집어넣는다. 이웃 나라 독일 영도자의 체코 합병 야욕이 현실화되어 가던 1930년대 후반, 디테는 독일 출신의 아가씨 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애국자의 길이 아닌 부역의 길을 걷게 된다. 다수의 독일인이 살던 수데텐란트가 뮌헨회의에서 히틀러의 협박으로 독일에 할양되자, 그동안 핍박받던 디테의 시대가 도래한다.

디테 개인의 이야기는 어느 시점을 계기로 해서, 파란만장한 역사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체육교사에서 고위당원으로 변신한 리자와 결혼하기 위해 하자가 없는 슬라브인이라는 점을 검증받는 모욕적인 과정을 디테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디테는 동료 호텔리어로부터도 그리고 아내 리자의 동료로부터 무시당하는 현실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 적국의 친위대 장교는 물론이고, 나치 민족우월주의로 건강한 아이들을 생산하기 위한 인간양성소에서 임신부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로 봉사하면서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의 인식 세계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한편, 나치 게슈타포에 볼셰비키로 몰려 모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장면에서는 나치의 보헤미아, 모라비아 총독으로 체코 출신 특공대에게 암살당한 하이드리히의 보복으로 마을이 쑥대밭으로 변한 리디체 출신의 남자와 만난 장면은 정말 전율이었다. 오래전에 본 영화 <새벽의 7인>에 소개된 리디체는 마을의 성인 남자 전원이 학살당하고, 여성들은 모두 강제수용소로 소개된 체코 현대사의 잊을 수 없는 현장이었다. 이 암살 사건에 대한 잔혹한 보복 때문에 연합국은 나치 요인 암살을 꺼리게 되었다고 했던가.

전쟁이 끝나고 부역 혐의로 반년형을 살고 나온 디테는 폭격으로 죽은 리자가 남긴 우표책을 밑천으로 삼아 채석장 호텔을 차린다. 이어지는 공산주의 시대에 부자들과 어울려 자발적으로 정신교화 시설에 수감되기도 하지만, 디테는 놀라운 현실 적응력으로 시련의 세월을 이겨낸다. 처음 네 편의 이야기와 달리 마지막 백만장자 이야기는 몰입이 떨어지는 약점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디테의 이야기는 만족스러웠다.

보후밀 흐라발은 호텔이라는 공간을 통해 고상한 척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위선을 남긴 없이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이나 장군 같은 정치가, 사회지도층 역시 예외는 아니다. 호텔이 청구하는 돈만 지급할 수 있다면, 그들을 위한 호텔에서 제공하지 않는 서비스는 없다. 어린 소년은 그렇게 보고 배운 대로, 삶에 적용한다. 물론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적용 과정을 거치다 보니 승승장구한다.

게다가 아비시니아 황제까지 모셨던 경험은 디테의 귀중한 자산이다. 비록 디테는 그가 평생 받고 싶어하던 부자들이나 동료 호텔 경영인들에게 인정은 받지 못했지만, ‘한 때 황제를 모셨었지’는 그의 삶의 지표로 작동한다. 인간과 상황에 대한 냉정한 판단은 전 유럽을 석권했던 독일 제국이 러시아 침공을 하면서 몰락을 맞이하고 결국 패전하게 될 것이라는 정확한 예측에 도달한다. 역시 황제를 모셨던 통박의 위력은 대단하다!

성장소설, 흥미진진한 캐릭터의 진화 그리고 체코 현대사라는 세 가지 요소를 능수능란하게 조율하면서 이렇게 멋진 소설을 쓴 작가 보후밀 흐라발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인지 맛보기를 한 기분이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재밌게 읽어서 아주 기분이 좋다. 보후밀 흐라발의 다른 작품도 읽을 기회가 생겼으면 참 좋겠다. 아, 그리고 영화도 있다고 하는데 구해서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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