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하진, 조지프 콘래드 그리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공통점은? 바로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롤리타>로 널리 알려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절망>을 읽었다. 그전에 <롤리타>와 <사형장으로의 초대>를 샀지만, 정작 나보코프의 책을 읽기는 처음이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모국어인 러시아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나보코프 특유 언어유희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볼셰비키 혁명과 내전의 와중에 세바스토폴을 떠난 나보코프 가족은 영국에 정착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슬라브어와 로망스어를 전공한 나보코프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보코프 가족은 1920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했는데 2년 뒤, 러시아 군주주의자에게 아버지가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1937년 프랑스로 그리고 1940년에는 미국으로 계속되는 망명을 해야 했던 나보코프는 1955년 영어로 발표한 <롤리타>의 대성공으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다. <절망>은 1936년에 처음 발표되었으며, 작가에 의해 1937년 그리고 1966년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절망>은 독일계 망명 러시아인으로 초콜릿 사업을 하는 부르주아 사업가 게르만 카를로비치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게르만이 사업 때문에 방문한 프라하 인근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분신, 펠릭스라는 부랑자를 만나게 되면서 빚어지는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나보코프는 자신의 페르소나로 추측되는 게르만을 내레이터로 삼아, 소설에 직접 개입한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어 보지 않아, <절망>만으로 그의 스타일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주변 상황에 대한 모호한 설명과 묘사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줄기를 잡아간다.

게르만의 위태로운 삶의 한 축에는 자신을 끔찍하게 사랑하지만, 어리바리하고 경박하다고 평가하는 아내 리다가 있다.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가 의심스러운 사촌이자 형편없는 실력의 화가 아르달리온이 있지만, 게르만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게르만의 관심은 오로지 파산으로 치닫고 있는 작금의 위기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그가 고른 방법은 실재했던 이류 보험사기의 재구성이다. 완벽을 꿈꾸는 범죄가 언제나 그렇듯 게르만의 어이없는 실수로 바로 꼬리가 잡힌다.

시인이자 작가라고 자부하는 주인공 게르만의 삶에 대한 자전적 서술은 독자에게 모호하게 다가온다. 소설의 곳곳에 등장하는 나보코프가 구사하는 러시아어 특유의 언어유희는 주석이 없었다면 독해할 수가 있었을까? 게르만은 분명히 펠릭스에게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데, 그 목적은 펠릭스의 예상대로 자신에게 좋은 방향이 아니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소설 <절망>에는 마치 암실에서 인화지에 상이 맺히듯이 조금씩 자신의 계획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게르만의 행동과 사고를 쫓는 깨알 같은 재미가 있다.

당대의 석학인 장 폴 사르트르도 이 책을 오독했을 정도로 나보코프의 <절망>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나보코프는 게르만이 자신의 도플갱어라고 굳게 믿는 펠릭스의 이야기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일체의 도덕적 교훈을 배제한 서사의 마법을 좇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종착역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말미에 실린 역자의 친절한 해설은 소설의 모호함과 혼란을 식혀 주는 시원한 청량제처럼 다가온다. 대개 해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절망>의 경우엔 꼭 읽어야만 했다. 해설의 도움으로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시킨, 도스토옙스키으로 대표되는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보코프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었다.

나보코프의 <절망>은 1978년에 독일 출신의 영화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절망:양지로의 여행>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었다. 영국 출신의 배우 더크 보가드가 게르만 역을 맡은 영문판 결말을 그대로 재현한 영화는 어떨지 궁금하다. 나름 열심히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도 과연 나보코프의 소설을 제대로 읽었는지 찜찜하다. 조만간 그의 대표작 <롤리타>의 험버트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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