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
체 게바라 지음, 김홍락 옮김 / 학고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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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최후를 다룬 글을 리더스다이제스트를 통해 읽었다. 보수적인 성향의 리더스다이제스트는 예상대로, 혁명수출을 위해 라틴아메리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볼리비아에서 무장 게릴라 활동을 벌인 공산주의자 체 게바라의 약식재판도 없는 처형을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서술했다. 모든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고려한다면, 과연 어느 한 쪽의 이야기만으로 지난 세기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칭송받은 인물을 너무 단편적으로만 그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다년간 외교사절로 활동한 김홍락 볼리비아 대사의 세심하면서도 유려한 번역으로 만나게 된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일기>는 어느 혁명가의 최후를 균형 잡힌 시선으로 보게 해주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준다.

<볼리비아 일기>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게릴라 전사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1966년 11월부터 이듬해 10월 볼리비아 유로계곡 전투에서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처형되기 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쿠바에서의 성공 후, 어떻게 보면 전 세계의 억압받는 모든 인민을 해방하겠다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호응하는 열혈 혁명전사로 거듭난 체는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를 다음 혁명의 전초기지로 결정한다.

쿠바에서의 게릴라 활동이 체의 생애 가장 빛나는 성공의 순간이었다면, 볼리비아에서의 그것은 역설적으로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육필로 쓴 볼리비아에서 일기에는 무장 게릴라 투쟁 성공에 대한 확신과 30대 후반 게릴라 전사의 신념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외부와의 연락 두절, 볼리비아 공산당과의 반목, 현지 농민 계급의 밀고 그리고 식량 부족으로 인한 끝없는 보급투쟁의 과정은 볼리비아에서 체의 실패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온다.

바티스타 독재정권 타도와 외세축출이라는 뚜렷한 목적으로 투쟁의 대오를 이뤘던 쿠바에서와는 달리, 나름대로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선출된 바리엔테스 정권의 토대는 체 게바라와 마닐라(쿠바의 암호명)의 예상과는 달리 강건했다. 게릴라 활동의 필수적인 민중의 지지와 지원도 거의 받을 수가 없었다. 볼리비아 공산당과의 헤게모니 다툼도 한몫했다. 설상가상으로 쿠바, 볼리비아, 페루 같이 다양한 국적으로 구성된 체의 게릴라 부대는 활동 초기부터 불화와 반목으로 지도자 체에게 걱정거리를 안겨준다.

그들이 주로 활동하던 리오그란데 강 유역의 정글의 기후와 지형에 적응하지 못한 게릴라 부대는 그 지역 농민의 길 안내에 의존해야 했고, 친정부적인 성향의 길라잡이들은 그들의 활동을 그대로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전달했다. 식량이 떨어져 야생동물을 잡아먹으면서 게릴라 부대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기강 해이와 부주의로 대원들이 희생되면서 이탈자도 속출했다. 한 때 정부군을 상대로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활약을 벌이던 체의 게릴라 부대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투쟁을 계속한다. 8월 말 바도 델 예소 전투의 패배와 호아킨 부대의 전멸로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다가오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다.

번역을 맡은 김홍락 대사는 최후의 유로계곡 전투와 라이게라에서의 처형으로 갑자기 끝난 체 게바라의 마지막 일기를 친절하게도 에필로그와 볼리비아 게릴라전에 참가했던 게릴라들의 약력으로 보충 설명해준다. 원래 에르네스토 게바라를 생포할 때만 하더라도, 처형계획이 없었지만 그에 동조하는 세력의 준동을 우려한 볼리비아 정부는 복잡한 재판 과정을 생략하고 그를 처형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체와 그의 동지들이 꿈꾸던 라틴아메리카 해방의 꿈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대신 라틴아메리아 곳곳에서 우익 군사독재로 인한 부정부패와 쿠데타의 악순환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게릴라 지도자답게,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냉정하게 매일매일의 사건을 기록하고 월말에는 냉혹한 평가로 자신과 혁명과정을 비판했다. 동시에 피할 수 없었던 동지들의 희생 앞에서는 문학가를 능가하는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음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쿠바와 콩고에서 사선을 넘으며 투쟁했던 카를로스 코예요(투마)와 엘리세오 레예스 로드리게스(롤란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면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게릴라 지도자가 아닌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체 게바라가 마지막을 맞았던 볼리비아의 라이게라와 리오그란데 유역은 이제 유명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볼리비아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최후를 맞은 체 게바라의 후광이 여전히 낙후된 지역에 살고 이들에게 비추고 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에 다시 읽는 한 시절을 풍미했지만, 실패한 게릴라 전사의 마지막 기록은 그래서 더 멜랑콜리한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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