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론드 1
조이스 캐럴 오츠 지음, 강성희.송기철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조이스 캐럴 오츠.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 그리고 필립 로스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미국 출신 대가를 마릴린 먼로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블론드>로 처음 만나게 됐다. 아직도 미국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섹스 심벌이자 사랑의 여신 그리고 그녀의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뉴욕 지하철 위에서 바람에 부푼 흰색 드레스를 부여잡은 그녀의 이미지는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조이스 캐럴 오츠는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사랑의 여신의 신화에 도전한다.

우선 오츠 작가는 노마 진 베이커(마릴린 먼로의 본명)의 유년시절로 소설을 시작한다. 실재 인물로 주인공으로 했지만, 전기가 아닌 소설인 만큼 그녀는 사실적 바탕에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모든 이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지만, 이생에서 36년이라면 짧은 삶 속에 끝없이 사랑을 갈구했던 은막의 스타 마릴린 먼로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 수줍은 성격에 말까지 더듬고 항상 불면에 시달려야 했던 스타의 가족사로 시작한다.

엄마라는 말 대신 언제나 어머니라고 불러야 했고, 할리우드 영화산업계의 귀퉁이에서 은막의 스타들을 동경하며 언젠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노마 진의 아버지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던 글래디스 모텐슨은 나이 어린 딸에게 확실히 좋은 엄마는 아니었다. 가난한 모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자동차에 휘발유를 채우고, 할리우드 명사들의 으리으리한 저택 순례에 나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잇장 같은 글래디스의 정신이 분열하면서 어린 나이에 노마 진은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하게 된다. 실제로 노마 진은 여러 위탁 가정에 맡겨졌다고 하지만, 소설에서 작가는 워렌 피릭 가정 하나로 축약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달랐다고 했던가. 어려서부터 예쁘고 귀여웠던 노마 진은 아름다운 아이에서 소녀로 그리고 여자로 성장한다. 고아원 시절 크리스천사이언스를 신봉했던 원장의 영향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애정의 외연을 확대하기도 한다. 노마 진의 양어머니 엘지 피릭은 그녀에 대한 남편의 뜨거운 시선과 뭇 남성들이 노마 진에게 던지는 추파의 의미를 파악하고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나어린 노마 진을 시집보내기로 한다.

“빅대디” 버키 글레이저와 행복했던 신혼은 꿈처럼 지나가고, 2차 세계대전 열병에 휘말린 미국의 여느 남성처럼 버키는 군이 입대한다. 이제 소녀에서 여자가 된 노마 진은 블레이저 가문에 들어가 사는 대신, 홀로 서는 삶을 시작한다. 전시에 남성 노동력이 부족해진 미국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급증하는데, 작가는 이런 사회상을 소설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어느 카메라맨에게 발탁된 노마 진은 미국의 후방을 지키는 여성 모델로 드디어 그녀가 어려서부터 꿈꾸던 할리우드에 진입하게 된다.

<블론드>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다뤄야 하다 보니, 소송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법적 다툼을 피하고자 이제는 죽고 세상에 없는 노마 진을 제외한 인물에 대해서 가명을 써야 했나 보다. 노마 진의 첫 번째 남편 그리고 그녀가 관계했던 할리우드 제작자도 이니셜로 처리했다. 물론, 알려고 해서 위키피디아나 구글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 바로 다 알 수 사항이었지만.

조이스 캐럴 오츠가 통속적인 소재로 글을 쓴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데, 결국 문학이라는 것이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닌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책날개에도 나오지만, 남자만의 전유물처럼 그려졌던 광기와 폭력의 세계를 여성에게도 적용하는 작가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는 할리우드의 신화가 되어 버린 실존인물 마릴린 먼로의 빛과 어둠 그리고 역사의 빈 공간을 작가적 상상력을 채워 넣은 <블론드>는 어쩌면 조이스 캐럴 오츠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대공황, 전쟁 그리고 마녀사냥이 몰아닥치기 시작하던 할리우드에 대한 조이스 캐럴 오츠의 해석 역시 일품이다. 대공황 시기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무엇이라도 팔아야 했던 시대의 아픔, 모든 것을 바꿔 버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들썩이던 미국 남자들의 단면도 빠지지 않는다. 전후 공산주의 러시아와 대결하게 된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수호국가라는 미국에서 중세에서나 일어났을 법한 매카시즘, “빨갱이 사냥” 열풍이 벌어진다. 스타가 되기 위해 요즘도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성상납이 그 당시에도 횡행했다는 사실에 입맛이 씁쓸해졌다. 남성권력이 지배하는 스튜디오 계에서, 어쩌면 아름다움은 재능이 아니라 고통의 원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이는 화려한 은막의 세계보다 ‘정상’적인 삶을 갈망했던 노마 진이 할리우드에 적응하기란 난망한 일이었으리라.

<블론드> 1권에서는 노마 진이 우리가 아는 스타의 길을 향한 고난의 행진을 시작한 여정을 다루고 있다. 평생 애정 결핍에 시달려야 했던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를 통해 카메라 앞에서는 언제나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지만,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았던 사랑의 여신의 개인사를 알 수가 있었다. 할리우드 진출 초반의 역경과 <아스팔트 정글>과 <나이아가라>를 통해 세기의 스타가 되는 과정이 그려질 2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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