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교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인터넷 언론매체인 프레시안에 토요일마다 올라오는 책소개 코너를 유심히 본다. 주류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그래서 아예 그런 책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책들과 만나는 행운을 종종 얻곤 한다. 지난 주말에 내가 그렇게 해서 만난 책이 바로 독일 출신의 시인이자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언론에 보도된 보도사진에 4행의 사진시(詩)를 단 <전쟁교본>이다.

나치의 핍박을 피해 신산한 삶을 살았던 브레히트는 독창적 시선으로 독자에게 전쟁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는 방법을 제시한다. 비주얼화된 사진이라는 이미지는 카메라맨에 의해 포착된 순간이다. 어제 지인과 이 책을 함께 보면서 한 장의 사진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브레히트가 선별한 사진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많은 관심이 있어서 눈에 익은 몇몇 사진들을 <전쟁교본>에서 볼 수가 있었다. 마치 복습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동남아의 새로운 식민지배자로 등장한 일본군에 맞서 싸운 미군의 모습에서 새로운 지배자의 모습을 본다거나, 독일군으로부터 해방한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미군정 장교가 잉여생산으로 남아도는 밀을 해방지역 시민에게 파는 장면 등은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속의 숨겨진 이면의 고발하고 있었다. 골수 제국주의자였던 영국의 전시수상 윈스턴 처칠이 기관단총을 든 사진은 무력으로 세계정복을 하려던 히틀러의 그것과 너무 흡사했다.

자신이 형제라 불렀던 독일 농민과 노동자의 아들들이 러시아 전선에서 역시 자신과 같은 계급의 러시아 사람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장면에서도 브레히트는 반전 평화주의자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패전한 병사들의 철모에서도, 작가는 그 모자가 주인공들에게 머리에 올려져 있을 때가 실제 비극의 클라이맥스였다고 고발한다. 도대체 어떤 가치를 위해 싸웠단 말인가? 미국과 영국이 스탈린의 줄기찬 요구에도 미적거리던 제2전선은 결국 스탈린이 이끄는 적군이 독일 영토에 들어선 다음 순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쟁교본>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그동안 서방세계가 끈질기게 주장해온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2차 세계대전의 승기를 잡게 되었다는 주장의 허구를 엿봤다고나 할까.

나치 세 거두로 명명한 히틀러, 괴링 그리고 선전장관 괴벨스를 다룬 일련의 사진에서도 작가의 풍자와 조소는 끊이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 전쟁영웅이자 제국의 이인자였던 괴링, 히틀러의 순장조였던 괴벨스는 나누는 가상의 대화는 브레히트 특유의 블랙유머가 작렬하는 순간이다(27번째 사진, 괴링과 괴벨스). 독일의 전쟁영웅이었던 6명의 원수(Field Marshall)의 사진에서도 브레히트는 그들을 ‘살인자’라고 명명한다.

사회주의자였던 이 망명 작가에게 암울했던 나치 시절은 꼭 청산하고 넘어가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어느 편지에서 나치 시대의 비극을 축출하고, 냉정하고 올바른 평가를 할 것을 주문한다. 동시에 이 신성한 의무를 후대로 미루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의지는 책의 맨 끝 페이지에 실린 그가 남긴 단 한 편의 <평화교본>에 잘 들어나 있다. 새로운 시대의 전범으로 브레히트가 <평화교본>을 완성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세기가 흘러 이런 의식 있는 지식인의 글을 만나는 기쁨을 무엇에 비할까, 책을 읽는 내내 전율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