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비가
쑤퉁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쑤퉁 작가의 <화씨 비가>를 다 읽고 난 느낌은 먹먹하다였다. 가난과 고통의 질곡에 시달리는 화씨 가족사는 제목 그대로 비극 그 자체다. 중국의 역사를 20년 정도 뒤로 돌렸다는 문화혁명기를 지나 1970년대를 시작으로 이십 년에 걸친 슬픈 가족사를 읽다 보니 “왜”라는 질문이 끝없이 터져 나온다. 왜 어머니 위펑황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왜 주인공 화진더우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화씨 일가를 맴도는 걸까? 왜 화씨들은 대오각성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어머니 위펑황이 죽고, 아버지 화진더우 마저 방화죄로 감옥에서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다. 아니 남은 가족들은 어떡하라고? 정말 무책임한 가장이 아닐 수 없다. 사군자 매란국죽(梅蘭菊竹)을 따서 이름 지은 네 딸 신메이, 신란, 신주, 신쥐와 철부지 막내아들 두후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화진더우의 누이 고모가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가부장제를 고수하면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아들이 최고라는 봉건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쑤퉁 작가는 화진더우와 고모를 통해 적확하게 짚어낸다.

그렇게 배를 곯으면서도 아들 두후에게는 잘 먹이려는 것이 어머니이자 아버지 역할을 떠맡은 고모의 마음이었을까. 손위 누이들마저 그렇게 두후 녀석을 떠받치다 보니 그만 망나니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상한 친구를 만나 게이의 길을 걷질 않나, 두후란 놈은 부모가 속 터져 죽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가 보다. 그러니 구천을 떠도는 원혼 화진더우는 지상에서 돌아가는 꼴이 하나도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더러운 윗물 때문에 아랫물이 깨끗하겠냐고 자조한다.

화씨 일가의 비극은 아버지와 어머니 대에서 끝나지 않고, 자손에게까지 계속된다. 둘째딸 신주는 임신해서 중절 수술을 하던 중에 불의의 사고로 그만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만다. 큰딸 신메이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지만, 가정불화에 고모의 말실수로 그만 신랑이 반신불수가 된다. 양아치 건달이 된 두후 놈은 매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다. 헌신과 봉사로 화씨 집안을 받쳐온 고모는 조카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노구를 이끌고 나서지만, 결국 객사하고 만다. 어쩌면 이렇게 구질구질한 인생들일까. 문득 작년에 읽은 천명관 작가의 한국판 막장 드라마 <고령화 가족>이 떠올랐다.

쑤퉁 작가는 화진더우 일가의 비극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진행된 전통적 가족관에 대한 해체를 그리고 있다. 삶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가족은 서로에게 짐이 될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딸들은 차례로 위펑황이 죽은 연료 창고의 주임 류페이량을 찾아가 행패를 부린다. 합리적인 사고 대신 감정적 대응으로 얻어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들은 세상을 향해 분풀이를 늘어놓는다.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이승을 떠도는 원혼이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가의 대담함이 새삼 눈에 띈다. 현실감각을 잃지 않은 쑤퉁은 화진더우를 물리적 현실세계에 개입시키지 않고 오로지 관조적 자세의 서술자로만 활용한다. 하긴 귀신 화진더우가 활약을 했다면 <화씨 비가>는 판타지가 되었겠지. 소설 속에서 화씨들은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처연한 몸부림을 치지만, 가장의 부재로 인한 빈곤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가장이 가져야 할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화진더우의 존재는 가족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위펑황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와 아들 두후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화진더우의 위신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조금이나마 품었던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를 한 방에 날려 버린다.

사실 소설 초반에 이런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고모와 신주가 낙향해서 위펑황의 경고를 무시하고 임시중절을 시도하다 봉변을 당하면서 쑤퉁 작가의 서사는 힘을 얻는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문화혁명 시기에 화진더우가 지주 계급에 대한 악의적 공격을 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인과응보의 순환이 밝혀지면서 비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짝으로 나온 <성북지대>가 불량소년들의 성장기를 그렸다면, <화씨 비가>는 가족의 구성과 해체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어쩌면 가족 내의 희생과 헌신이 이제는 미덕이 되지 못한 새로운 시대의 초상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차마 자식들을 떠날 수 없었던 어느 아버지의 솔직한 고백은 그래서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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