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이산의 책 10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주원준 옮김 / 이산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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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테오 리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아마 어쩌면 역사상 중국에서 활동한 가장 유명한 외국인이 아닐까. 하지만,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을 읽기 전까지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어느 나라 출신인지, 중국에서 무슨 활동을 했는지 그저 풍문으로 들어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중국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16세기 말, 중국 명나라 만력제 시대에 예수회 사제의 신분으로 전교를 위해 중국에서 남은 생을 마친 인도자이자, 전교자 그리고 연금술사로 알려진 마테오 리치의 삶을 그가 개발한 이미지 기억술을 통해 재구성한다.

마테오 리치는 1552년 이탈리아의 로마 교황령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황청 산하 예수회의 부속학교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한 리치는 1571년 수련수사로서 종교에 귀의한다. 일생을 전교에 바치기로 서원한 리치는 스페인과 함께 당시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포르투갈 코임브라에서 한 때 수학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의 동양 거점이었던 인도의 고아를 거쳐, 1582년 마침내 중국 마카오에 상륙한다. 1610년 베이징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리치는 자신의 반생을 중국 전교에 매진하게 된다.

대항해시대와 반종교개혁의 분위기가 서유럽을 휩쓸고 있던 중상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리치는 명나라의 만력제가 다스리는 중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전투적 가톨릭주의의 사도로 등장한다. 예수회 사제이자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던 리치는 중국인을 이해하기 위해 서구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구조로 되어 있는 중국어 배우기에 전념한다. 동시에 중국인에게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자신이 개발한 기억술(기억의 궁전 짓기)이 무척이나 유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중국인의 꿈인 과거시험을 치르고, 관료의 자리에 오르길 희망하는 수험생에게 암기에 유용한 것으로 알려진 리치의 기억술은 비장의 무기였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이 흥미진진한 전교사 마테오 리치의 전기를 여느 평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서술한다. 그는 리치가 선보인 기억술. 기법(記法)을 다음의 네 가지 한자로 기억의 궁전 네 모퉁이 각각 배치한다. 武-要-利-好는 각각 싸우는 자세로 고정된 두 명의 전사, 후이후이족 여성, 이익과 수확을 상징하는 농부 그리고 아이를 돌보는 하녀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리치는 자신이 상상 속에 짓는 기억의 궁전에 체계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는 의미를 가진 이미지를 배치함으로써, “서양의 과학지식과 신학상의 수양을 원용”하면서 전교와 중국인 교화의 방법으로 사용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졌다(43쪽).

작가는 사제로서 마테오 리치의 개인적인 삶을 저술의 기조로 삼으면서, 당대 시대상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을 빠뜨리지 않는다. 중국 예수회에서는 어떤 식으로 전교를 위한 재원 확보를 했는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중국 마카오에 이르는 원양 항해를 직접 체험한 리치의 진술을 토대로 16세기 말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5백 년 전의 다양한 기록을 통해, 지금과는 전혀 달랐던 당대 생활 모습을 살펴보는 재미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 때, 종교인이 우대를 받는 서양의 사고로 승복을 입고 전교에 나서기도 했던 리치는 중국 사회에서 승려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서는, 보다 현실적은 접근을 시도한다.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지식인 계급을 상징하는 유학자 옷을 입은 그의 초상을 볼 수가 있는 것 같다. 당시 중국인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태엽 시계와 다양한 서양의 문물을 통해 전교에 전념하던 리치는 문자와 인쇄술이 발달한 중국에서 서적의 유포를 통한 선교가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인 저술 활동에 착수한다. 자신의 기억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중국식으로 재해석한 <천주실의>와 <교우론> 같은 저술은 중국 지식인에게도 좋은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 신앙이 유교 경전이 목표로 삼는 국가의 안위와 평화 달성에 이바지할 거라는 점을 리치는 확신했다.

리치는 중국에 대한 열렬한 찬양가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인 숭배자는 아니었다. 그리스도교 정신에 반하는 노예 제도가 엄연히 상존하고 있었고, 중국의 악습 중의 하나인 어린이 인신매매에 대해서도 리치는 눈을 감았다. 교황이 거주하던 로마가 그랬듯이, 중국에서도 매춘업은 성행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의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던 동성애 역시 일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중국에서의 합법적인 거주허가를 얻기 위해 부패한 명나라 관료를 상대하는 데도, 리치를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레이 황 교수가 자신의 저서 <1587 만력 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에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꼽았던 리즈(이탁오) 같이 저명한 지식인과의 교류에 대한 사실 역시 인상적인 지적이었다. 역사 저술을 읽는 재미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런 텍스트 간의 유기적인 상호연관성이다.

리마더우(利瑪竇)라는 이름으로 28년간 중국에 살았던 전교사 마테오 리치의 삶을 통해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16세기 말 동서양을 아우르는 역사의 스펙트럼을 분석해낸다. 너무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조금 산만한 경향도 없지 않지만, 개인의 삶과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잡아낸 대가의 노고가 돋보이는 역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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