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이산의 책 1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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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9월의 추천도서 <룽산으로의 귀환>을 통해 영국 출신의 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 교수를 알게 됐다.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중국사 전문가로, <룽산으로의 귀환>을 비롯해서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왕여인의 죽음>, <반역의 책> 그리고 이제 이야기할 청나라 네 번째 황제 <강희제>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방대한 고증을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통치기간 기록을 가진 강희제의 삶을 재구성한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부황 순치제의 갑작스러운 죽음(23세)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강희제는 자그마치 61년 동안이나 제위를 지켰다. 치세 초기에는 보정대신의 간섭을 받던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무를 숭상하던 만주인의 피를 이어받은 강희제는 잦은 사냥으로 철저하게 중국화되는 것을 경계한다. 첫 번째 장인 <사냥과 원정>에서 강희제의 이런 모습을 조너선 스펜스는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는 청조 이전의 이민족 왕조인 금나라와 원나라가 한화(漢和)되면서 멸망했다는 사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말을 달리며 활을 쏠 정도의 실력을 갖춘 강희제는 짐승을 쫓는 사냥과 자신에 반대하는 정적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원정을 동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8년간 청조를 뒤흔들었던 우싼구이(吳三桂)가 이끄는 삼번의 난과 1696-1697년 2년간 세 차례에 걸친 준가르부 갈단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태평성세의 기초를 닦는다.

한편, 강희제는 국가의 안정을 위해 무력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피를 토할 정도로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문치주의의 기틀을 닦았다. 만주귀족과 한인 관료의 갈등을 조절하면서도, 훗날 자신의 황태자 인렁의 후계 문제로 파당이 결성되었을 때는 단호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두 번째 ‘치세’(다스림)편에서는 ‘훌륭한 정치란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하는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치세 원칙을 설명한다. 백성과 신하의 의견을 듣기 위해 주접제도를 활용한 강희제는, 자신에게 올라오는 상주의 본질을 꿰뚫는 명철한 권력자이기도 했다. 사대부들이 상주를 정적을 음해하고 보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수없이 중앙으로 올라오는 상주문의 진위를 파악하는 일은 엄청난 정력과 집중력을 요구했다. 한편, 명대 말기 환관의 발호로 국정이 어지러워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강희제는 환관의 본연의 임무 외에는 정치에 관여할 수 없게 했다.

삼번의 난 진압 시, 투항한 적을 다룰 때에도 철저하게 실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강희제는 난이 아직 진압되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한 반란군을 주살하면, 남은 반란군이 철저하게 항전하리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온건한 유화책을 채용했다. 물론, 반란이 끝난 다음에 반란 주모자들은 모두 주살시키는 냉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강희제는 형벌은 앞으로 벌을 내리지 않게 집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치세 동안 문자옥으로 벌을 받은 사람은 다이밍스(戴名世) 하나뿐이라는 선언은 자화자찬처럼 들린다.

반란 진압으로 소요되던 재정은 반란이 진압되면서, 막대한 흑자로 전환되면서 비로소 강희제 치세에 힘을 주기 시작한다. 강희제 역시 의전과 전례로 많은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평생 황성인 자금성을 떠나지 않았던 명나라 시대의 황제들과는 달리 백성을 돌보고 각종 치수 사업 등을 시찰하기 위해 각지로 순행에 나서기도 했다. 각성을 다스리는 순무와 총독에게 명령을 내려, 철저한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재정확보의 내실을 도모했다. 인재 등용에서도 기존의 과거제의 폐단을 지적하고, 바로잡는데 힘을 기울였다. 능력이 뛰어난 인재라면, 과거에 합격한 진사가 아니라도 등용하는 파격적인 인사를 보여주기도 했다.

60년에 걸친 치세를 함께한 노 대신의 은퇴 요청에는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자신의 곁에 붙잡아 두었다. 실무는 젊은 관료에게 맡기게 하고, 국정에 대한 조언자로서 역할을 당부했다. 대신들의 건강을 고려해서, 조정에 출석하는 의무와 공적인 책임까지도 면제해 주는 세심한 면도 보여준다.

진시황처럼 영생불사라는 허황된 꿈 대신, 생로병사라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잘 알았던 강희제는 생전에 상유라는 이름의 유조를 내리기도 했다. 이렇게 영명한 군주였던 강희제 역시 후계 문제에서는 황태자 인렁으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하늘 아래 절대 권력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말해주듯이, 황태자 인렁 편에 서서 파당을 결성했던 세력은 모두 강희제에 의해 불벼락을 맞았다. 인렁이 폐위된 후, 수많은 황자 가운데 자신과 가장 비슷하다는 인전이 후계자로 내정되고 강희제의 뒤를 이어 청나라의 다섯 번째 황제 옹정제로 등극하게 된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는 <강희제>에서 1인칭 관점으로 강희제 자신이 직접 말하는 양식을 취한다. 강희제는 내외의 적들을 쉴 새 없이 토벌하여 국가안보를 확보하고, 치수와 농업생산을 장려하여 국가 재정을 소위 말하는 강건성세(康乾盛世: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청나라의 황금기)의 기틀을 닦았다. 수많은 자손을 두고, 최고 권력자로서 수십 년간 제국을 통치한 군주였지만, 할머니 황태후의 병환을 직접 간호하는 충실한 손자였고, 원정길에서도 황성에 남은 가족들에게 진귀한 과일을 보내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많은 현명한 신하들의 조언을 듣고 국가정책을 정했지만, 결국 최종 결정은 황제 자신의 몫이었다. 실패한 인재 등용이나 자신의 실수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는 그의 모습에서 참된 위정자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었다. 이런 위정자가 다스리는 태평성대가 재현될 수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에 젖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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