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훔친 황제의 금지문자 - 문자옥文字獄, 글 한 줄에 발목 잡힌 중국 지식인들의 역사
왕예린 지음, 이지은 옮김 / 애플북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고래로 절대권력자는 자신에 대한 날 선 비판을 원하지 않았고, 유력한 비판세력인 지식인 그룹을 통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근과 채찍이라는 양면정책을 사용한 현명한 군주도 있었지만, 흉포한 독재자는 대개 당근 대신 채찍을 선택하곤 했다. <영혼을 훔친 황제의 금지문자>의 저자 왕예린 선생은 중국 왕조역사 가운데, 글과 말로 말미암아 화를 입은 것을 문자옥(文字獄)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그중에서도 설화로 인한 인신의 구속, 관직의 삭탈, 참수와 주살 같은 결과를 가져온 일단의 사건에 방점을 찍는다.

왕예린 선생은 중국사에 등장하는 문자옥의 기원을 춘추전국시대에까지 소급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첫 문자옥의 영예는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그 유명한 분서와 갱유가 모두 진시황 시대에 벌어졌다. 통일제국 진나라의 승상 이사는 법가 신봉자로 왕도정치와 봉건제의 구현을 주장하는 유가의 이데올로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운 제국의 통치 질서로 법가사상을 채택한 이사는 반대파 숙청을 위한 수단으로 여타 사상을 탄압했다. 분서가 이사의 작품이라면, 갱유는 시황제는 자신의 절대권력에 사사건건 도전하는 유생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단행했다고 볼 수가 있겠다. 천년제국을 꿈꾸었던 독재자의 제국은 시황제의 사후, 유방과 항우의 반란으로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진시황의 문자옥이 특정 계급을 상대로 한 것이라면, 진나라에 이어 등장한 한나라 시대 양운의 문자옥은 개인의 글이 가져온 최초의 문자옥으로 볼 수가 있다. 관료로 개인적 성취를 이뤘던 양운은 태사공 사마천의 외손자로, 세도가로 활동하던 중에 탄핵을 받아 서인으로 강등된다. 하지만, 서인으로 강등된 뒤에도 지역 호족으로 세력을 행사하던 양운에게 손회종이라는 이가 충고를 했지만, 이에 대한 답을 글로 남겼다가 화를 당했다. 그의 죄명은 대역죄였지만, 실상은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과 충돌하던 지방 호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황제권의 발동이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렇게 문자옥은 태생적으로, 권력자의 반대파 숙청의 한 수단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대부와 문인의 비판에 너그러웠던 당송시대는 그야말로 그들의 태평성대였다. 특히, 무인정권으로 출발했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 문인 사대부를 우대했던 송나라 시대에는 태학생을 중심으로 한 문인정치가 절정에 달했다. 황제에게 올리는 상주는 국정을 위한 우국충정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정적을 음해하고 공격하려는 방법이기도 했다.

송나라 인종 시대의 명신 범중엄은 엄격하고 강직한 사대부의 전형으로, 세간의 사대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여이간으로 대표되는 범중엄의 정적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범중엄이 군신 간을 어지럽히고, 그의 잘못을 공격했다. 범중엄의 무고함을 아는 대신들이 변호에 나섰지만, 황제의 노여움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는 구법파로, 한림원학사를 지낸 당대 최고의 지식인 구양수는 편지로 범중엄을 변호했다가 자신마저 귀양 길에 오르게 된다. 이런 일단의 사건으로 의기 있는 사대부는 천 년 동안 칭송받을 방명을 남기게 되었지만, 그 반대편에 섰던 고약납과 간신의 대명사 진회는 영원토록 세간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고 왕예린 선생은 서술하고 있다.

명청시대의 문자옥에 비하면, 그래도 송나라 시대의 문자옥에는 낭만이 깃들어 있었던 것 같다. 몽골족의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중화제국을 세운 주원장은 제목 그대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란 격언을 그대로 보여준다. 원래 배움이 깊지 않았던 유민 출신의 주원장은 홍무제로 명나라의 태조로 등극한 다음, 어설프게 배운 학문을 바탕으로 수많은 지식인을 황천길로 보내 버렸다. 전혀 다른 뜻임에도 황제를 능멸한다는 이유로 문인들을 주살했다. 물론, 그의 그런 이면에는 공포정치로 인한 황제의 독재권 강화라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명태조의 아들 연왕 주체는 적통을 이은 조카 건문제를 3년간에 걸친 <정난의 변>으로 축출하고 자신이 보위에 오른다. 정통성을 가지지 못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연왕 주체(성조 영락제)는 당대의 뛰어난 학자 방효유를 회유하려고 하지만, 건문제에 대한 충절을 버리지 않았던 방효유는 찬탈자 주체의 요청을 거절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분노한 주체는 방효유 일족과 자신에 반대하는 문인을 악랄한 방법으로 주살했다. 명나라 시대의 지식인 계급은 송대에 정주리학으로 완성된 충효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확고한 행동 원칙과 가치관에 입각한 시대정신의 화신이었다. 그 결과, 만주족이 이끄는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했을 때, 멸청흥한이라는 구호 아래 수많은 한족이 대의를 위해 아끼지 않고 목숨을 내던졌다.

왕예린 선생의 서술에 의하면, 청나라 시대의 문자옥은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강희-옹정-건륭 연간을 이르는 ‘강건성세’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문자옥으로 얼룩졌다. 그 결과, 수많은 사료가 소실되고, 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제국의 치세 초반, 왕권강화와 권력투쟁이라는 정치적 목적으로 청나라 황제들은 문자옥을 이용했다. 특히, 군부지도자 연갱요와 자신의 외삼촌인 융과다의 제거를 위해 치밀하면서도 교묘한 숙청을 진행한 옹정제의 작전은 정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한편, 증정의 역모를 역이용해 자신의 관대함을 과시하면서 또 한편으론 여유량의 저서를 불태우는 강온전략을 구사한 점 역시 인상적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영국 출신의 역사가 조너선 스펜스가 저서 <반역의 책: 옹정제와 사상통제>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도도한 장강의 흐름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가 없듯이, 진실을 감추고 사상을 통제하겠다는 의도에서 권력자가 일으킨 문자옥 역시 영원할 수는 없었다. 역사적 사실은 정사가 아니더라도 패관 문학 같은 야사를 통해 후세에 전승되었고, 역사의 흐름이라는 순리에 저항한 독재자와 간신 무리의 이름을 청사에 길이 남기는 순효과를 불러왔다. 그런 점에서 중국 역대 왕조에 나타난 문자옥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왕예린 선생의 <영혼을 훔친 황제의 금지문자>는 과연 일독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러 사건을 다루다 보니 아무래도 그 깊이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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