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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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이 세계 문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계 루마니아 작가 헤르타 뮐러가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찾았다. 그녀가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있는 이 순간에, 헤르타 뮐러의 책과 네 번째로 만났다. 꼭 노벨문학상을 받아서가 아니라,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비현실적인 전체주의 독재와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에 끌려갔던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에게 호기심으로 시작된 헤르타 뮐러 읽기는 자연스레 전작주의로 날 인도하고 있다.

1986년에 발표된 헤르타 뮐러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루마니아 속담으로 현실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력한 인간적 존재를 빗댄 표현이라고 할까. 이 작품은 영어로 <The Passport>로 번역이 되어서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주인공 빈디시 가족이 그토록 원하던 것이 바로 조국 루마니아를 탈출할 수 있는 여권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자전적 소설의 키워드라고 할 수가 있겠다.

독일 서남부의 슈바벤 지방을 연상시키는 루마니아 독일계 주민이 사는 바나트 지방의 슈바벤 지방을 배경으로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펼쳐진다. 개인적으로 헤르타 뮐러 작가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과연 독일어로 글을 쓰는 그녀가 독일인인가 아니면 루마니아인인가 하는 궁금증이 드는데, 루마니아에 살면서 독일인으로 살아온 소수 민족으로서의 독일계 루마니아 사람들에 대한 이모저모가 작가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몇 겹의 은유로 쌓인 채 조금씩 드러난다.

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빈디시-카타리나 가정의 아멜리에 외에 다른 이들은 모두 목수, 야간경비원, 재단사 그리고 모피가공사 같은 그들의 직업으로 명명된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철통 같았던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에서 쓰인 글이어서 그런지 철저하게 익명성을 담보한다. 이 슈바벤이라는 마을의 독일인들은 루마니아 사람들을 ‘왈라키아인’이라고 부르면서 철저하게 독일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수하며 살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루마니아인들과의 정치, 사회, 문화적 충돌을 유추해본다. 전쟁이 끝난 다음, 독일계 주민이 소련으로 강제로 끌려갈 때 과연 그들이 왈라키아인이라고 부르던 이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야간경비원의 사과나무 주둥이가 사과를 먹는다는 말에, 라틴어 미사를 드린 신부가 사탄이 사과나무에 들어 있다고 선언하면서 중세풍의 화형식을 선고한다. 동시에 수많은 슈바벤의 가정들은 루마니아 정부의 수탈, 착취와 억압을 피해, 동족이 사는 독일로의 이주를 꿈꾼다. 그래서 빈디시 역시 정나미가 뚝 떨어진 조국 루마니아를 떠나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권이 필요한데, 이 여권을 받기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파렴치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나마 남아 있는 가장(家長)으로서 한 조각의 양심 때문에 빈디시는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한편,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추축국의 일원으로 대소전에 참가했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이 끝난 뒤, 소련의 강제노동 수용소에 끌려가 가난과 추위 속에 참혹한 시절을 보낸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에서는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된 이 에피소드가 헤르타 뮐러의 최근작 <숨그네>에서 훨씬 풍부하고 자세하게 그네들이 겪은 고통에 대해 적나라한 해부를 시도한다. 그녀의 부모 세대에 공통으로 각인된 고뇌의 유전자가 작가를 통해 다시 한 번 재현된다.

헤르타 뮐러의 소설 작법의 특징인 간결하면서도, 산문시를 연상시키는 그녀의 시적 표현들은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올빼미가 마을의 구성원의 죽음을 예고하는 슈바벤에서 “일주일간 하늘은 깡그리 불탔”고(39쪽), 부정과 부조리가 만연한 가운데 “성당 톱니바퀴들이 죄의 시간을 재”고 있었다(49쪽).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보통 사람의 숨통을 옥죄어 오는 전체주의의 망령 앞에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는 어서 이 악몽의 순간이 지나가길 바라는 “빗물의 기도”(79쪽) 밖에 없었다.

“자기와의 의사소통, 대화 그것이 문학이었다”라는 말로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의 암울했던 시대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헤르타 뮐러는 자신이 저술한 텍스트가 독자와의 교감을 통해 사회고발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고 인터뷰에서 설명한다. 작가가 직접적으로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있는 사실 그대로의 서술만으로도 진실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문학의 근원적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다음 차례는 <마음짐승>인가? 헤르타 뮐러 전작주의에 대한 발자국이 한 걸음 더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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