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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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에서 로베르토 볼라뇨 전집이 나온다고 해서 참 오래 기다렸다. 지난 2월에 열린책들에서 아후벨이라는 탁월한 일러스트레이터까지 동원해서 표지 작업을 하고 666원 짜리 버즈북으로 한껏 분위기를 내서 곧 그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를 했었는데, 볼라뇨 전집의 제2탄인 <부적>을 만나기 위해 넉 달을 기다려야 했다. 세 번째인 <먼 별>도 이번 주 안으로 받아보게 되길 기대한다.

내가 처음 읽었던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사실과 가상의 세계를 오가는 그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작법에 그만 매료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칠레의 밤>은 피노체트 독재정권 아래서 부역했던 어느 신부와 비밀조직의 고문장소로 씌인 파티하우스 이야기 말고는 사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부적>과 <먼 별>을 주문하면서도 우려가 됐다.

솔직히 말해서 <부적>은 재밌는 소설이 아니다. 얄팍한 책의 두께에 쉽게 읽겠거려니 하고 달려들었다가 거의 일주일이나 걸려서 간신히 다 읽었다. 멕시코시티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1968년 9월,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UNAM) 습격사건 당시 대학에 있었던 주인공 아욱실리오 라쿠투레의 잊을 수 없는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보수 우파가 장악하고 있던 멕시코 정부군이 올림픽을 앞두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 200여명을 무참하게 학살했던 역사적 사건이 로베르토 볼라뇨에 의해 문학적으로 재구성된다. 그런 면에서, <부적>은 증언문학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다.

우루과이 출신 아욱실리오는 대학 부근에서 근근하게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레온 펠리페나 페드로 가르피아스 같은 대시인들의 허드렛일을 해주면서 그들과 교류한다. 그녀는 1968년의 학살사건을 경험하면서 그 이전의 삶과 결별하게 된다. 그 체험은 마치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나 1980년 광주를 연상시킨다. 실존적 삶은 시대의 전환을 이루게 하는 일대 사건을 통해 단절을 통한 의식과 사고의 총체적 변화를 강요당한다.

이 때, 아르투로 벨라노가 등장한다. 이 십대소년은 명백하게 ‘틀라텔롤코광장 학살사건’ 당시 멕시코에 살던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페르소나다. 벨라노는 50년대에 태어나 백척간두에 선 살바도르 아옌데의 인민연합을 지지하기 위해 조국 칠레로 갔다가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경험한 세대를 상징한다. 아옌데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마감했던 혁명동지의 죽음을 뒤로 하고 벨라노는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온다.

시대정신의 붕괴를 체험한 벨라노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존재가 아니다. 멕시코시티에서 또래 친구 에르네스토 산 에피파니오를 남창들의 왕으로부터 구해내는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도 아욱실리오는 등장해서, 목숨을 건 모험에 동참한다. 그녀와 화가 레메디오스 바로와  체 게바라의 옛 연인으로 알려진 릴리안 세르파스의 교류도 빠지지 않는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쿠바 혁명에 투신하기 전에 멕시코를 전진기지로 삼았다고 했던가. 그런 점을 고려해서 볼라뇨는 카스트로와 면담하기 원하는 이태리 로맨티스트의 이야기도 슬쩍 끼워 넣는다.

칠레에서 태어나 멕시코, 프랑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생을 마친 로베르토 볼라뇨는 평생 이방인의 운명을 지고 살았다. 짧은 소설 <부적>에서도 그는 철저하게 이방인의 시선으로 68년의 전설을 해부하고, 재구성해서 독자에게 들려준다. 당시 사회적 정의와 변화를 추구하던 젊은이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사회를 주도하는 계층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던 빈부의 격차, 실업문제 그리고 민주화 요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라틴 아메리카 청년들의 멕시코에서 시작된 변혁에 대한 갈망은 5년 후 칠레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맞이한다. 아욱실리오를 괴롭히는 트라우마는 바로 이런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그 저변에 깔고 있다. 로베르토 볼라뇨는 과거의 참담한 실패와 고통을 복기하면서, 놓을 수 없는 희망의 끈에 대해 진중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잃어버린 영웅적 위업에 대한 사랑, 욕망 그리고 쾌락에 대한 부적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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