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정도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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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스벤 헤딘의 전기를 읽고서, 사막의 황량함을 사랑하게 됐다. 어린 시절 사막 행을 꿈꾸던 나는 이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막을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됐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호주에서 사막을 꿈꾸었다. 하지만, 내가 본 사막은 헤딘이 들려준 무한 모래사막이 아닌 붉디붉은 흙 사막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정도상 작가의 신작 <낙타>를 통해 다시 사막과 만났다. 표지를 장식한 태양이 작열하는 모래사막 위에 있는 낙타 사진에 문득 십수 년 전의 추억이 피어올랐다. 작가가 인도하는 사막은 바로 몽골에 있는 고비 사막이다. 그가 사랑하는 아들 규와 함께 삼천 년전 흉노족 전사가 그린 태양사슴의 암각화를 보기 위해 부자는 험난한 모래사막의 테비시를 찾아나선다.

사막여행의 동반자 규는 공부와 대학입시라는 잔혹한 경쟁을 통해 밥과 꿈을 동시에 이루라는 부모의 닦달에 시달리는 수많은 21세기 대한민국 청소년의 초상이다. 하지만, 규는 공부 대신 그림을 그리며 자유의지를 꿈꾼다. 그가 그리고 싶은 그림 역시 대학입시의 방편으로 여겨져 설화석고상을 그리라는 강압적 상황에 내몰린다. 삶의 모든 가치가 물질적 성공으로 환원된 우리의 끔찍한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규가 황량한 사막과 초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라도 승자독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멘트 정글이 아닌, 자연과 사람이 서로 조화와 합일을 이루는 몽골 초원의 법칙을 따르고 싶지 않을까. 규와 양의 대화를 통해, 양이 사람이 기른다는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을 체험했다.

초원의 법칙에 바로 적응한 아들 규와는 달리 도시의 허접하고, 의미 없는 소음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무한의 자유가 주어져도 주체할 수 없는 우리네 모습을 엿본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면서도, 막상 그 일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게 되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마는. 그 정도로 우리는 시멘트 정글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몽골 초원에서 길을 잃은 부자는 불량, 소심 낙타와 잠깐 동행하기도 하지만, 낙타들은 그들의 곁을 무시로 떠난다. 우연히 만난 조르흐, 체첵 부녀와 암각화를 찾기 위한 여행을 계속한다. 규는 또래 몽골 소녀 체첵과 어울리며 자아를 되돌아본다. 솔롱고스인의 눈에는 그들이 삶이 남루해 보일진 모르겠지만, 대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그들이 나의 눈에는 더 행복해 보인다.

절대 고독과 황량함에 매료되어 사막을 찾은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위로와 안식이 아니다. 모래폭풍이 휘날리는 사막은 인간의 삶을 희롱하며, 어설픈 낭만 대신 자아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아는 건 무엇이었나라고 묻는 아버지의 깊은 회한이 묻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열렬할수록, 치명적이라고 했던가. 작가는 규와 몽골 소녀 체첵과의 대화를 통해, 그 사랑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사랑이었는지 묻는다. 자기만족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사랑이었느냐고 말이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친구가 없다고 앵무새처럼 떠들어 대면서도, 정작 자신이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기를 망설이는 세태가 떠올랐다. 삶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면서도, 망각이라는 손쉬운 선택을 한 우리의 업보일까. 아니면, 꿈과 희망 때문에 그렇게 지쳤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사랑의 주술을 찾을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가 말하는 추억은 과거 어느 특정한 순간을 아름답게 편집한 새로운 기억이라고 한다. 낙타 걸음으로 과거의 애상을 시나브로 보듬는 주술의 성공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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