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
토마 귄지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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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책 표지를 유심히 보는 편이다. 그런데 벨기에 브뤼셀 출신의 작가 토마 귄지그의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의 표지는 왠지 ‘처칠’스러워 보이는 남자의 뱃속의 풍경만을 슬쩍 본 채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책을 펴들다가 이 책에 실린 7개 이야기 중에 두 개의 매치되는 일러스트를 분별해낼 수가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차를 도난당한 것으로 진술하는 어느 다중이의 이야기(연쇄살인마에 방화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암소 여자를 데리고 사는 앙리의 그것이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는 40대 초반의 토마 귄지그는 어려서 난독증으로 고생했다고 하는데, 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즈음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서점에서 10년간 큐레이터로 일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로 현재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글을 쓴다. 공수도와 태권도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기린> 편에는 카티와 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여느 부부처럼 말다툼 끝에 카티가 가출을 감행하고, 은근한 화해를 도모하던 중에 정원에 난데없이 기린의 시체가 등장한다. 이렇게 황당할 데가! 도대체 기린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이유로 해서 봅네 정원에 기린이 죽어 있는지를 작가는 불친절하게도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죽은 기린을 처리하기 위해 폴란드 출신의 일꾼 다레크를 동원한다. 한창 기린을 처리하는 봅과 다레크 앞에 나타난 카티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떠나 버린다. 그렇게 떠나 버린 카티에 대해 봅은 여성 모두에 대한 전형적인 일반화의 오류를 적용시킨다.

<금붕어>에서는 다중이 프랭크가 나온다. 자신의 르노 자동차가 끔찍한 범행에 사용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 프랭크. 어, 그런데 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희대의 살인마 한니발 렉터 박사가 떠오르는 걸? 하지만, 렉터 박사는 적어도 다중이는 아니었지, 살인에 다중인격, 심지어 자신의 차에 불까지 지르는 복잡하게 짬뽕으로 버무려진 한판 스릴러가 전개된다.

<암소> 편은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이야기 중의 하나다. 사랑의 부재에 시달리며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는 무매력남 앙리는 우연히 무료 신문 전단지에 실린 “자연스럽고 순수한 교제” 광고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수술가운을 입은 남자로부터 슬픈 표정의 젊은 여자를 인도받는다. 그녀가 ‘암소’라는 다소 황당한 말과 함께 말이다. 암소 마갈리는 앙리에게 드림걸이었지만, 수술가운을 입은 남자의 말대로 암소의 속성을 그대로 지닌 마갈리에게 앙리는 그만 질려 버리고 만다.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 싫증 내 버리는 앙리의 모습에서 극단적 이기주의 화신의 프로토타입을 보여 준다.

<곰, 뻐꾸기, 무늬말벌, 청개구리>는 그 제목만큼이나 혼란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 브루스 리의 안락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파괴하는 일단의 삼합회 두목들의 아이콘을 제목으로 삼은 이야기에서 악당들은 브루스 리의 소득에서 세금 공제하지 않은 33%를 자신들의 몫으로 주장하면서 브루스의 아이들과 사랑스러운 부인을 차례로 인질로 잡아 갖은 만행을 저지른다. 인질범들의 악랄한 협박에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브루스의 모습에서, 한 때 ‘테러범들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라는 지켜지지 않는 원칙을 천명했던 미국 정부의 완고함이 연상됐다. 이 고집불통의 인간은 결국 폐인이 되어, 요가 지도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 브루스는 어쩌면 자신의 기가 막힌 불행에 그만 실성하거나 감각이 마비된 게 아닐까?

<썰매 끄는 개>에 나오는 35살 소심 씨는 자신의 여러 결점 중에서 소심함이라는 결정적 요인 덕분에 마이너스 인생을 살고 있다. ‘컴퓨터가 용량 부족을 호소’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야동을 모으는 소심 씨는 부족함과 바보스러움까지 장착한 나머지 해소할 수 없는 리비도로 사서 고생을 하고 있다. 핍쇼클럽에 당당하게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침마다 들르는 피에로 크루아상 분점의 ‘얼굴 찡그리는 여자’를 이상야릇한 연금술로 말미암아 사랑하게 된 소심 씨! ‘얼굴 찡그리는 여자’에게 소심 씨는 그저 신경이 거슬리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이런 소심 씨가 어떤 계기를 통해 그만 일탈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걷잡을 수 없는 그의 리비도는 폭주하기 시작한다.

토마 귄지그는 모두 7개의 이야기를 통해 남성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블랙유머를 덧입히고 있다. 때로는 작가의 꼴마초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성에 대한 옴므 파탈스러운 폭언을 구사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욕망의 근저를 파헤치는 작업에 매진한다. 갑자기 등장한 다중이 프랭크의 엽기적 행각과 브루스 리를 압박하는 삼합회 두목들의 과도한 폭력행사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작가는 인간 세계를 쁘띠 주(petit zoo), 작은 동물원으로 비유하면서 이에 대한 판단은 모두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 이런 일들이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작가로부터 일관된 내러티브나 남성의 심리를 속속들이 알려주는 비법을 기대했다면 아마 낭패를 볼지도 모르겠다. 에피소드는 전혀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 옴니버스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솔직히 말해서 책을 읽다가 그만 어디선가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수동적인 책읽기에 길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작가가 똑 부러지게 A=B 라는 프로토타입을 제시해 주었더라면 더 속이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단편집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으로 워밍업을 했으니, 이제 그의 첫 장편 소설이라는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을 기대해 본다. 단,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한 마무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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