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독서본능 - 책 읽기 고수 '파란여우'의 종횡무진 독서기
윤미화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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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 그래! 이 책의 저자 파란여우님이 리뷰를 한 86편의 책 중에 크로스오버 되는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니 말이다. 다시 한 번 책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오묘하며 무궁무진한지 깨달을 수가 있는 좋은 계기였다. 지난 5년간 독서 일천 권의 내공을 쌓아, 그 가락을 배경으로 해서 세상에 책 한 권을 낳는 개가를 올린 파란여우님께 우선 축하를 드리고 싶다. “책 좀 읽는” 이들의 로망에 선빵을 날리시는 데 대한 존경과 시기를 적절히 비벼서. 책이 책을 낳는다는 내 생각을 입증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케이스가 있을까?

파란여우님의 서평집인 <깐깐한 독서본능>을 읽기에 앞서 알라딘에 차린 파란여우님의 블로그를 살짝 들여다봤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걸, 리뷰들이 나의 수준이 맞지 않게 너무 어려운 게 아닌가! 그래서 사실 겁을 집어먹고서는 읽어 보지도 않고 바로 블로그를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책 읽을 생각에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부터 고지식하게 읽을 생각도 없었지만, 책에 실린 서평 중에서 나의 기호에 맞을만한 책에 대한 리뷰부터 골라 먹기 시작했다. 파란여우님의 아이디와 책의 제목으로 뽑은 “깐깐한” 사이에는 왠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동질감이 배어 있는 것 같아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파란여우님 이전에도 책에 대한 서평을 모은 서평책이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파란여우님은 인터넷 파워블로거로서 그녀가 생산해내는 글들이 거대한 하나의 담론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래서 바로 선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담론을 통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신기원을 창조해 나가면서 자신이 담론 그 자체가 된다는 것! 듣기만 해도 매혹적이지 않은가?

책 좀 읽는 사람으로서 나의 관심은 인문, 역사 그리고 소설 정도에 치우쳐 있다. 그 누군가 어느 모임에서 말했듯이 나도 당당한 편협한 독서편식가다. 자신도 이미 그 증세를 잘 알고 있어서 아예 고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파란여우님의 지평은 더욱 광활하고 드넓다. 한국문학, 외국문학, 고전과 인문을 에둘러 평전과 환경, 생태 그리고 문화 예술에 다다를 때에는 정말 상대의 내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블로그를 둘러보고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책에 실린 서평들은 부담 없이 즐길 수가 있었다. 부질없는 극단적 사고의 부산물인 노파심 덕에 단디 겁을 먹었었나 보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딴지총수의 유럽에 경도된 신사대주의를 신랄하게 꼬집어 대고, 최근 <공무도하>를 발표해서 성공 가도를 질주하고 있는 노작가를 철저한 계산가이자, 수려한 언어의 설계사라는 표현으로 둘러메치는 통쾌함도 책쟁이들에게 선사해 준다.

좀 고상한 리뷰어들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오쿠다 히데오를 ‘짧은 문장, 발랄한 문체 그리고 간단한 마무리’라는 특징으로 무장한 일단의 일본 작가군의 대표격으로 지목해서 요리를 즐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노르웨이 출신의 노작가 크누트 함순의 나치 부역에 대해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콜롬비아 출신의 수다쟁이로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현란한 구라와 뻥이라는 주술에 걸려 읽게 된 <백년 동안의 고독>의 추억에 잠시 젖기도 했다. 독서토론회에서 발표하기 위해 시작은 했지만 결국 완독하는데는 실패했던...

오쿠다 히데오의 사두기만 하고 아직 읽지 못한 <남쪽으로 튀어>에 이어, 전설적 아니 주술적 구라쟁이 마르케스의 읽다 만 <백년 동안의 고독> 그리고 존 키건의 <2차세계대전사>가 아닌 왜 <1차세계대전사>냔 말이다. 이렇게 슬쩍슬쩍 비켜 가던 책들이, 고우영 작가의 <삼국지>에서 비로소 그 절대적 공감을 형성하게 된다. <열국지> 혹은 <초한지>의 캐릭터들의 변용이라고나 할까? 이모 작가의 공전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삼국지>에서 촉한정통론과 관우숭배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가. 고우영 선생은 제갈공명과 관우와의 대결을 유비가 거느린 가신그룹 내 신구세력의 대결로 몰고 간다. 하지만, 동쪽의 오나라오 협력하고 북쪽의 위나라와 대결하라는 공명의 말 대신 만인지용으로 중원을 내달리던 관운장은 중원통일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형주를 빼앗기고, 자신의 목숨마저도 잃게 된다. 파란여우님이 리뷰한 고우영 선생의 <삼국지>가 없었더라면 정말 아쉬울 뻔했다.

개인적으로 서평이란 어느 특정한 담론과 타자와의 소통을 그 전제로 한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 보고서 자위할 서평이라면 굳이 블로그라는 오픈 공간에 내놓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파란여우님이 제시한 서평공책-나는 독서노트라고 부른다-에 고이 모셔 두면 될 것이다. 파란여우님은 자신의 서평이 책으로 나오는 데 대해 겸연쩍어 했지만, 사실 시간과 방법상의 문제일 따름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직 책을 읽지 않았거나 혹은 책을 읽었어도 여전히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나 같은 중생들을 위해 글 잘 쓰는 법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그래.

조금 아쉬운 점으로는 파란여우님의 책읽기와 인터넷 검색에 그 넓음의 풍성함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곳곳에서 깊이의 부족이 느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존 키건의 <1차세계대전사>에서 1차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독일-오스트리아에 대결한 세르비아의 뒤에 러시아가 있다고 간단하게 짚고 넘어갔는데 게르만족과 슬라브 민족주의라는 뿌리 깊은 반목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서는 내가 어렸을 적에 흑인의 대명사로 불리던 쿤타 킨테가 나온 <뿌리>를 텔레비전 미니시리즈가 아닌 영화로 착각하기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평을 읽으면서 문학적 상상력보다 영화적 비주얼이 우선하는 걸까 하는 착시가 일기도 했다.

<깐깐한 독서본능>을 읽으면서 서평을 읽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호소력 있는 글을 쓸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파란여우님이 책에도 썼다시피, 타인의 방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나만의 독서스타일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책쟁이들에게는 모두 자신만의 암묵지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책읽기와 글쓰기에 왕도는 없는 것 같다, 다독(多讀)과 꾸준한 공부만이 책 좀 읽는 이들을 위한 고언(苦言)이란 생각이다. 물론, 글 잘 쓰는 마법의 로션 같은 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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