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같은 책쟁이로써 솔직히 고백하면, 타인의 독서기(讀書記)를 읽는 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을 것 같다. 그 이유는 바로 저자가 소개하는 책에 대한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어떻게든 원전을 읽게 될 테니 말이다. 지난 10월에 출간돼서, 서점가에서 그야말로 일대 돌풍을 일으킨 유시민 선생의 <청춘의 독서>는 나에게 그야말로 태산 같은 높이로 다가왔다.

내 멋대로 독서주의자인 나는 모두 14편의 책에 대한 유시민 선생의 지도를 무시하고, 가장 먼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부터 시작했다. 서로 유기적인 연관이 없는 책들이니 그래도 무방할 것 같다는 자의적인 판단에서 일단 하인리히 뵐의 명작 소개를 읽었다. 문제는 처음으로 읽은 책의 지도에서부터 시작됐다. 도저히 원전에 대한 해갈을 참을 수가 없어, 결국 영화와 책을 차례로 보고서야 다시 <청춘의 독서>를 읽기 시작했다.

황색 언론으로 대변되는 독일의 보수신문의 폐해를 언론의 자유라는 핑계로, 사회적 약자로 등장하는 주인공 카타리나 블룸에게 얼마나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과 주변 관계를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었는지 독일의 위대한 지성은 실재의 불가피한 유사성을 들어 나에게 들려 주었다. 도저히 언론이라고 부를 수 없는 세 개나 되는 <차이퉁>이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2009년의 현실이 35년 전의 그것과 똑같은지 그야말로 소름이 다 끼칠 정도였다.

두서없이 끄트머리의 글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다시 본 궤도에 진입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로 돌아갔다. 유시민 선생은 이외에도 푸시킨과 솔제니친 같은 19세기 러시아 현실과 개혁과 혁명을 꿈꾸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미국이나 서유럽의 소설들에서보다 더 깊은 울림을 느꼈다고 썼다. 산업혁명 이래, 인류 역사의 축을 크게 뒤바꾸어 놓은 부르주아 세력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발호는 어쩌면 서유럽의 영국과 프랑스 혹은 독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차르를 위시한 지배계층은 서구의 산업화와 이에 따른 눈부신 사회의 물적 토대의 발전을 동경하면서도, 여전히 농노제와 전제주의 왕권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 결과,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서구 문물과 혁명적 사고를 접하면서 개화된 일단의 청년 장교들과 지식인들의 계급적 갈등을 <청춘의 독서> 곳곳에 인용된 글들에서 접할 수가 있었다. 한국인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푸시킨의 유일한 장편소설인 <대위의 딸>을 <카타리나 블룸>에 이어 두 번째로 주문했다.

비록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 왕도정치를 전국을 주유하면서 설파했던 원조 보수주의자 맹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일진일퇴의 초한대전에서 빛나는 무공을 세웠던 한신의 어이없는 죽음을 기록한 태사공 선생의 <사기>, 이제는 그 역사 발전의 근거를 잃어버린 채 자본주의 비판서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합작품이 <공산당선언> 그리고 수십 년 간의 치밀한 관찰과 연구 끝에 찰스 다윈이 발표한 <종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동서양과 고금을 아우르는 현란한 고전의 향기에 빠져 삼매(三昧)에 빠진 황홀한 독서의 시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유시민 선생의 글에 공감하게 되었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이미 기존의 고전에 대한 해설과 주석들은 원전의 컨텍스트를 넘어설 정도로 넘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주관적인 판단일진 모르겠지만, 그것은 선생의 삶을 관통하는 그 무엇과 일맥상통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책의 띠지에도 나와 있듯이, 선생은 ‘세상이 두려울 때마다 [고전]에게 길을 물었다’고 한다. 선생이 후기에서 문학적 접근보다는 사회과학도로서 문제의 본질에 대한 접근에 치중했던 것 같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산 수많은 독자가 선생에게 공감하는 건 바로, 선생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 앎과 현실계에서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역사학의 고전이 된 에드워드 핼릿 카 선생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지난 세기를 주름잡았던 랑케 실증사학의 미몽에서 깨어나, 아마 다른 별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이한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에서 물질과 재화에 천착하는 유한계급의 본성에 대한 빼어난 통찰의 과정을 대리체험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하는 유시민 선생의 통쾌한 해설과 지난 시절 우리 인식의 범주 밖에서 머물던 광휘로운 사상의 세계로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유시민 선생이 방향키를 잡은 작은 조각배에 얹혀서 드넓은 고전의 바다를 헤쳐 나왔다. 선생과 더불어 편견과 자의식 과잉에 빠진 맬서스의 이론에 조소를 날리기도 했고, 황색 언론의 무자비한 테러에 무너지는 카타리나 블룸과 함께 분노하기도 했으며, 시베리아 수용소에 갇힌 채 하루를 사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비참한 굶주림에 동참하기도 했으며, 토사구팽의 원조 한신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권력의 무상함을 느껴 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내가 미처 접하지 못한 고전의 세계는 넓고도 끝이 없다는 것과 늘어난 읽어야 할 책의 목록에 깊은 한숨이 절로 터져 나온다.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문명 역주행에 시대에, 방황하는 청춘을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선사해준 유시민 선생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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