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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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에 앞서, 책 표지에 실린 “뉴욕 타임스 선정 올해의 소설 1위”, “2008 퓰리처상 수상” 등의 화려한 미사여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히 이 책에 관해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노 디아스라고? 처음 들어 보는 작가 이름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이기에 하는 생각으로 위키피디아의 도움으로 이 책의 저자 주노 디아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주노 디아스는 1968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치면 올해 42세라고 한다. 카리브 해의 소국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 출신으로, 미국에서 일하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1974년 미국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주해 뉴저지에 둥지를 튼다. 5형제 중 3번째였던 주노 디아스는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맏형마저 백혈병에 걸리면서, 가난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어려서부터 <혹성탈출> 같은 SF영화들과 책을 좋아했던 그는 6km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서 공공도서관의 책들을 빌려다 보는 책벌레였다.

러트거스 대학에 진학해서는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이때 그에 영향을 미친 작가로는 토니 모리슨과 같은 라틴 계열의 작가인 <망고 스트리트>의 산드라 시스네로스가 있다. 대학에서 학업을 하면서, 접시닦이, 주유원 그리고 철공소에서도 일하는 등 그야말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비리그의 명문 중의 하나인 코넬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주노 디아스는 도미니카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보스턴에 소재한 MIT에서 ‘창조적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자, 그럼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가진 주노 디아스는 데뷔작 <드라운>을 발표한 지 11년 만에 드디어 자신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독자들에게 돌아왔다. 이 매혹적인 이민 2세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될 수가 있겠다. 성장소설, 디아스포라 그리고 도미니카 출신으로 희대의 깡패 독재자 트루히요에 얽힌 사연들이다.

소설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푸쿠(Fuku)는 어느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그 대륙에 사는 민중들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저주와 동격이란다. 저주인 동시에 금기로,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릴 지경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내내 따라다니는 트루히요의 푸쿠.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의 주인공이자 화자가 돌보는 오스카 데 레온(일명 와오)은 주노 디아스의 어린 시절의 페르소나처럼 들린다. 6살에 물 설고 낯선 미국에 이민 와서, 뉴저지 패터슨의 적대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작가의 분신인 오스카 와오는 어려서 총기 어리고, 도니미카 남자 특유의 매력을 실종시켜 버린 채 겁나게 뚱뚱하고, DC코믹스와 비디오게임에 미쳐, 스타일 구린 청소년기를 보낸다. 물론 그런 오스카가 멋진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을 리가 없다. 반면, 또 다른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오스카의 친누나인 롤라는 매력 그 자체다. 그리고 그 롤라를 사랑하는 화자 유니오르. 한 번에 적어도 스물 댓 명의 아가씨들과 데이트를 하는 인기남이다.

하류층 이민가정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데 레온 가족의 전투를 통해(여느 도미니카 모녀처럼 그들의 엄마 벨리시아와 롤라는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그들의 신산한 삶을 스케치해낸다. 그들의 생활무대인 뉴저지 패터슨은 게토고, 데 레온 가족은 산산이 부서진 삶의 편린들로 그려진다. 주노 디아스는 시공의 빈틈을 파고들어, 한 세대 전 오스카와 롤라의 엄마인 벨리시다 데 카브랄의 끗발 나던 시절로 독자들을 이동시킨다.

2부에서 “가련한 아벨라르”라는 제목으로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라는 실패한 소도둑이자 두목(엘 헤페:El Jefe) 혹은 쌍판(Fuckface)이라고 불리는 전무후무한 희대의 독재자로 데 레온 가족의 모국이자 뿌리인 도미니카 공화국을 장장 32년에 걸쳐 사기와 폭압으로 지배한 독재자, 그리고 주노 디아스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유튜브에서 구글 작가 시리즈 비디오 중에 주노 디아스 편을 구해서 보았는데 작가는, 누구나 트루히요의 이야기를 하지만 막상 그 진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도미니카인들의 트라우마 저편에 드리워져 있는 어둠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던가.

1930년부터 1961년에 이르는 32년 동안 비밀경찰조직을 앞세운 실패한 소도둑 트루히요는 도미니카의 모든 국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자신에 반대하는 이들을 가차없이 잡아다가 고문하고 아무도 모르게 처형을 시키며, 도미니카의 아름다운 여성들은 모두 제 것인 양 행동했다. 엘 헤페는 103%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웃 아이티에서 도미니카로 일하러 온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른 끝에 결국 일단의 반대파들에게 암살당하지만, 그의 ‘푸쿠’는 국가 도미니카를 그리고 ‘도미니카누스’들에겐 잊히지 않는 상흔처럼 남았다. 이런 엘 헤페의 후안무치한 행각은 또 다른 남미 출신의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독재자의 향연>이라는 책을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다루어졌다고 한다. 아직 국내에서 출간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던 오스카는 방학을 이용해 온 가족과 자신의 뿌리인 산토도밍고를 찾는다. 그리고 평생의 사랑이라 믿는 여인인 이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푸타고 온 집안 식구들이 나서서 그의 사랑을 말린다. 푸타가 뭔지 모르겠다고? 책을 읽어 보라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시시각각 오스카를 죄여오는 운명에 그는 굴복하지 않고, 평생 처음으로 당당하게 맞선다.

한 때 인종의 도가니로 불렸던 미국은 더는 이민자들의 천국이 아니다. 물론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지만, 건국 이래 미국의 목표였던 휘날리는 성조기 아래 동화(同化)는 ‘이상한 나라’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돼 버렸다.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는 이들은, 꿈에 그리던 미국에서 자신들의 게토 커뮤니티를 형성해 스팽글리쉬를 쓰며 뼛골이 빠지게 일하면서 난방도 되지 않는 거주지에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미국은 그들의 지향점이 아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이 신산한 삶을 청산하고, 언제라도 돌아갈 ‘산토도밍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미국의 현실에 동화하지 못하는 유색인종 아이들은 만화책과 <던전 앤 드래곤> 같은 비디오게임 속에 자신들만의 가상공간으로 탈출을 감행하고, 무지막지한 독서와 날적이를 한다. 이민 2세대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짓거리들이다. 반면 그들의 부모들은 세 가지 일자리를 가지지 않는 인간들은 모두 게으름뱅이로 치부해 버린다. 그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사고에 기초한 세대 간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부모들의 뇌리 속에서는 바티스타에(쿠바의 독재자), 악랄한 소모사 부자에(니카라과의 독재자), 그리고 우리의 ‘푸쿠’ 엘 헤페에 대한 지울 수 없는 무시무시한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배신할지 모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존재 자체가 지구 상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이 악당들의 지배가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도 그들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저주이다. 자신들의 조국에서 살 수가 없어, 디아스포라를 감행한 이들도 여전히 자신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도대체 그 끝을 알 수 없는 순환적 악몽을 주노 디아스는 라티노 특유의 구수한 입담과 유머로 풀어나간다.

책을 읽을 적에는 실패한 소도둑 엘 헤페의 말도 안 되는 작태가 마냥 우습기만 했는데, 작가의 대담을 보면서 그리고 여타의 자료들을 접하게 되면서 “이건 푸쿠가 빚어낸 비극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렌지를 먹다가 껍질을 길에 버렸다고 해서,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비밀경찰이 감옥으로 끌고 가 10년이나 갇혀 있다고 상상을 해보라. 정말 SF하고 ‘도미니카’스럽지 않은가.

유튜브에서 본 작가와의 대담에서 주노 디아스는 독자강연회에 모인 이들에게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의 몇 페이지를 읽어 주었다. 199-202페이지에 나오는 글이었는데, 자신의 과거에 대한 엑기스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강의시간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F가 들어간 말을 스스럼없이 뱉어내는 그의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오스카 와오의 짧은 삶 속에 녹아든 인생의 애환을 다룬 주노 디아스가 다음번에는 또 어떤 멋진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올지 벌써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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