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김연수 작가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사실 얼마 전에 새로 나온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단편선을 사서 읽다가 절반가량 읽고서 접어 버렸다. 풍문에 듣자하니 김연수 작가의 책들에 대해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뉜다고 하는데, 아마 <세계의 끝 여자친구>와 나의 궁합이 맞질 않았었나 보다. 대신 어제 읽은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적은 분량 때문인지 쉽게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한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김연수 작가식 사랑학 개론이라고나 할까. 격동의 세월이 지난 끝자락에서 대학생활을 한 세 명의 영문과 동기들의 엇갈리는 사랑, 그리고 다시 13년이 지나고 나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랑에 대한 고찰이 그 주를 이루고 있다.

사랑이 완성이 결혼은 아니라지만,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는 불완전하나마 어느 정도 완성품에 가까운 게 바로 그 결혼이라는 제도가 아닌가 싶다. 작가는 프랑스의 저명한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말을 빌려 결혼은 사랑하는 두 남녀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집단의 ‘상호증여’에 그 핵심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말 날카로운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최근 우리 사무실에서 결혼한 동료분이 접한 작금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어찌나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 말인지 모르겠다.

동갑내기 친구들인 증권사 직원 광수, 그의 아내가 된 선영(오래전 광고 문구에서 화제가 됐던 바로 그 ‘선영’이다) 그리고 소설가로서 룸펜 인텔리겐치아의 모습으로 사는 진우가 김연수 작가가 펼치는 사랑학 개론의 당당한 주인공들이다. 현명한 독자 제씨라면 바로, 통속적인 삼각관계가 연상될 것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 사랑이 있는데, <사랑이라니, 선영아>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부서진 감정의 껍질나부랭이들에게 둘러싸여 허우적대고 있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라고 할 수 있는 광수는 이제는 아내가 된 선영과 만인의 연인 진우와의 과거에 ‘오셀로’ 같이 시기와 질투심이라는 저급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자기파멸로 치닫거나 그러진 않지만 아름다운 여인을 홀로 독차지하려는 고독에 쩔은 보노보(다른 말로 피그미침팬지라고 한단다!)의 몸부림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광수가 집착하는 팔레노프시스, 우리 말로는 호접란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서 영어단어 deflower가 불현듯 떠올랐다. 결혼식장에서 미래의 아내 선영이 들고 있던 부케의 호접란 한 송이가 꺾여지는 것을 보고 불 같은 질투의 화신으로 변했던 그의 모습에서 순결강박증에 걸린 마초의 이미지가 선뜻 지나갔다. 어쩌면, 소설은 문학계의 자칭 서태지라는 진우가 아닌 광수가 써야 했던 게 아닐까?

사랑에 대해 김연수 작가가 글로 쏟아 놓은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아서 알파와 오메가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지 조금은 난감하다. 그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는 부분은 바로 사랑은 모든 감정의 ‘블랙홀’이라는 주장이었다. 작가는 인간이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집어삼키는 게 바로 사랑이라고 했던가. 역시 타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부터 사랑할 줄 아는 이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도 빼놓을 수가 없겠다. 도저히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타오르던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듯이, 사랑이라는 환영 속에 자신을 홀라당 빼앗겼던 이들도 사랑이 끝나고 나면 조용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그의 썰이 그야말로 묵시록처럼 뇌리를 스친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준비하거나 혹은 현재 진행 중인 이들에게 상대방의 정체성까지 요구하는 과도한 사랑은 될 수 있으면 피하라고 김연수 작가는 주문한다. 아마 작가는 그런 사랑일수록, 사람들이 거의 미칠 정도로 염원하면서도 이성적으로 거리를 두려 한다는 비밀을 남보다 먼저 깨달았나 보다. 마르크스 동무의 위대한 사회적 유산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기애, 고학력, 그리고 자의식 과잉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핑계가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시대에 멋진 사랑학 개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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