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피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읽는 동안 두 개의 영화에서 보고 느낀 기시감이 엄습해 왔다. 하나는 1982년 존 카펜터 감독의 <괴물>(The Thing) 그리고 다른 하나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데블스 오운>이었다. 전자는 카탈루냐 출신의 문화 인류학자이자 작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의 전반적인 줄거리가, 그리고 후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의 인생의 궤적을 조명해 준다는 점에서 서로 공명하고 있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는 어떻게 해서 화자이자 주인공인 내가 남대서양의 외딴 섬에 흘러들어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지난 세기 초반까지도 해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고아 출신의 주인공은 후견인을 만나, 인생 전반에 대해 배우게 된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반란의 기질을 지닌 아일랜드인의 후예답게 공화국군에 가담하면서,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결국, 영국으로부터 그렇게 원하던 독립을 쟁취했건만 새로 들어선 신정부 역시 기존의 영국과 다를 것이 없는 전제정치를 펼친다. 이에 환멸을 느낀 주인공 나는 자발적 망명길에 나서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이름 모를 섬에 기상관으로 발을 내딛게 된 나는, 행적을 찾을 수 없는 전임자의 부재 가운데 곧 삶을 위한 치열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밤만 되면 출몰해서 습격을 가하는 정체불명의 ‘괴물’들로부터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과 괴물 간의 이분법적 대립구도 속에서, 다른 것들은 돌아볼 여지가 없다. 이런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는 주인공과 이웃 등대에 거주하는 오스트리아 사람 바티스 카포라는 역시 신원을 알 수 없는 동지와 공통의 목적인 생존으로 의기투합한다.

끝없이 밀려드는 괴물들의 공격 앞에, 주인공과 바티스 카포는 바리케이드와 소총 심지어는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해서 무자비한 폭력으로 맞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인공은 괴물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설정은 마치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남아프리카를 침략할 당시, 그에 대항해서 맞선 줄루족 전사들과의 전쟁을 연상시켰다. 철저하게 서구인들의 처지에서 본 야만족들이 소설 <차가운 피부>에서는 무식하게 아무런 전략도 없이 오로지 인해전술로 밀어닥치는 “괴물”로 치환되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평화와 공존에 대한 생각은 소수의 의견일 뿐이다. 자신과는 다른 의견과는 일체의 소통을 거부하는 바티스 카포야말로 주류 식민주의자들의 표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바티스 카포가 마스코트로 데리고 있는 아네리스는 성적 착취의 대상이자 쾌락의 도구일 뿐이다. 왠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노라는 침략과 폭력 그리고 수탈로 일관했던 식민제국시대의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주인공은 그 와중에서도 자신이 섬에 파견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나름대로, 일지도 기록하지만 거듭하는 괴물들의 공격 앞에 모두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어느 순간, 괴물들의 세계에 침입한 인간들이야말로 이질적인 존재로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바티스 카포의 비협조 탓도 있지만, 여전히 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바티스 카포도 그리고 주인공도 마침내 1년마다 한 번씩 들르는 구원의 손길이 도착했을 때, 왜 그 지옥 같은 섬을 떠나지 않았을까? 거의 광기에 사로잡히다시피 해서, 살기 위해 수도 없이 총질을 하고 다이너마이트로 거의 자신들의 아지트인 등대를 날려 버릴 뻔 했으면서도 끝내 섬에서 벗어나는 걸 거부한 이유가 무얼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의 첫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흡입력이 점층적으로 작동하면서, <차가운 피부>에 몰입하게 하여 주었다. 괴물들에 대항하기 위해 마련된 레밍턴 소총과 2천 발의 탄알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다이너마이트라는 소설적 장치들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그 수많은 괴물을 달랑 두 명이 함께 도끼나 칼로 상대하는 게 말이 되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차가운 피부>에 이어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소개된 같은 작가의 <콩고의 판도라>가 기대된다. 이번에도 완전히 예측할 수 없고,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만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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