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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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가 타히티에 갔다고? 우선 이 책 <무지개>의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정체성은 참으로 모호하기만 하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 책으로 만나긴 이번이 처음이다. 요시모토란 이름은 분명 일본 사람일 텐데, 바나나란 필명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닌 지상낙원이라고 하는 남태평양의 타히티라니. 참으로 기이한 장소로 작가는 독자들을 초대한다.

<무지개>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27살 난 미나카미 에이코는 도쿄의 타히티안 레스토랑의 플로어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해변 관광지에서 자란 그녀는 아버지가 어려서 바람이 나 도망가 버리자, 어머니와 역시 홀로된 외할머니와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며 생활한다. 아,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모두 타히티에서 과거의 플래시백을 이용해서 전개된다.

어찌어찌해서 고향을 떠나 도쿄에 와서 십대 후반부터 <무지개>에서 일하게 된 에이코는 타히티의 그것을 고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레스토랑에 자신을 투영시킨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레스토랑에 격무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결국 과로로 쓰러지게 되면서, <무지개>의 오너와 점장으로부터 오너의 임시 가정부가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동시에 에이코는 타히티 본섬, 모로아 섬 그리고 보라보라 섬들을 유람하며 무엇엔가 휩쓸려 버린 감정을 추스른다. 남국의 강렬한 햇살에 생각마저 멈춰버린다고 푸념을 늘어놓는 그녀의 이야기가 점점 궁금해진다.

이야기가 서술되는 곳은 분명 이역만리 타히티인데, 주인공의 심리는 모두 자신이 떠난 도쿄에 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유 여행이라는 명목이지만, 역시 자신의 생활 터전인 대도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걸까? 듣기만 해도 부러워지는 라구나리움에서 바닷거북과 레몬색 상어들과 함께 헤엄을 치면서도,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남태평양 바다를 삼켜 버릴 듯한 에이코의 고민과 번뇌들이 조근조근하게 펼쳐진다.

오너 집의 가정부 생활을 하면서 돌보게 된 고양이 녀석과 개 녀석에게 한껏 정이 든 에이코는 필요 이상으로 (사람을 포함한) 생물들이 사는 공간에서 불현 듯 삭막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오너와 그의 아내의 가정불화는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심지어 곧 출산할 아이마저 오너의 아이가 아니라는 심증마저 굳혀지는 가운데, 개 녀석이 애완견 센터로 쫓겨나게 된다. 연민의 정으로 쫓겨난 개를 다시 구입한 에이코를 따라온 오너 다나카 씨와 작은 공명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타히티의 어느 호텔에서 우연히 저녁식사에 동석하게 된 가네야마 씨에게서 <무지개>의 오너와 점장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해 듣게 되는 에이코. 하지만 그네들의 이야기보다도 두 번의 결혼을 경험하게 된 가네야마 씨의 이야기가 더 그녀의 가슴을 파고든다. 세상에 많은 사랑이 존재하지만, 그 어느 사랑을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모든 존재들이 존재의 의미를 가지듯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이 느낀 사랑의 감정을 주체할 줄 모르는 에이코의 갈팡질팡한 심리 묘사가 타히티 섬의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어느 순간 다가온다. 시골에서 도시로 간 처녀는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근간을 잊고,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리라는 어머니의 염려가 적중했다는 사실을 과연 깨달았을까?

마스미 하라씨가 그린 일러스트는 마치 백 년 전 타히티를 찾아 원주민들의 강렬한 이미지를 서구 세계에 알렸던 폴 고갱의 그림을 닮았다.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일러스트들은 마치 타히티 현지인들과 흡사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이질적이라는 주장처럼 보인다. 거칠고 투박한 이미지들이 왠지 친근하게만 느껴진다.

<무지개>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여행 시리즈의 하나라고 한다. 아마 말미에 작가 후기가 없었더라면 영영 몰랐을 게다. 남태평양의 작렬하는 햇살 속에서 어느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바나나의 다음번 기착지가 어디가 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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