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문학 - 어울림의 무늬, 혹은 어긋남의 흔적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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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날개를 펴니 <영화인문학>의 저자 김영민 씨가 철학자 그리고 숙명여대 교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철학자가 쓴 영화비평이라, 아니 분석이라고 해야 하나? 한 때 영화평론의 꿈을 꾸었던 사람으로 과연 철학자의 시선으로 보는 영화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인문학>의 영어제목은 책의 표지에 박힘 글씨로 “Film & Humanities"라는 말과 함께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모두 해서 27편의 영화들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었다. 이 책을 펴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이 중에 내가 본 영화는 몇 편이나 되는지 조용하게 꼽아 봤다. 내가 본 영화는 모두 6편이었다.

각각의 영화 분석들은 우선 예의 영화들의 엑기스처럼 다가오는 스틸샷 한 장명과 저자가 신중하게 고른 부제로 시작된다. 해당 영화를 만든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페이지 분량의 썰을 푼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인 영화를 인문학적 깊이를 가지고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말미에는 지은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조금 달아 놓는 센스도 잊지 않는다. 대략 이런 구성으로 책이 진행된다.

이태리 영화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라 돌체 비타(아름다운 인생)>으로부터 그 제목을 따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김지운 감독의 <아름다운 인생>이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눈에 밟힌다. 불가의 선문답을 연상시키는 화두로 시작한 이야기는, 보스(김영철 분)와 선우(이병헌 분)의 갈등 구조를 타고 관객들을, 그리고 여기서는 독자들을 압박해 나가기 시작한다. 상명하복이 절대적인 조직 세계에서 이유와 원인의 관계를 따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마치 무한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의 재서술(再敍述)의 그림자가 얼비친다.

<가족의 탄생>과 <바람난 가족>편에서는 21세기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되고 있는 가족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예의 핵가족 시스템은 채 1세기가 되지 않은 새로운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모든 관계가 모름지기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가족의 구성과 본질 역시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건 아닐까? 특히 <바람난 가족>에서 남편을 아웃시키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욕망이 분출되며 마지막으로 새로운 생산성을 기대해 본다는 저자의 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가장 최소단위인 가족 내의 창의적 불화가 과연 생산성에 어떤 식으로 공헌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냥 우스운 코미디 영화로만 봐왔던 <넘버 쓰리>와 송능한 감독에 대한 날카로운 픽업이 눈에 띄었다. 별다른 내러티브 없이 삼류 캐릭터들의 좌충우돌을 사회적 풍토와 문화적 관습에 대한 냉소로 그려낸 감독의 역량을 저자는 말한다. 땀을 흘리지 않는 불한당(不汗黨)인 건달과 신부의 세 가지 공통점(183쪽)에 대한 언급은 시대상에 대한 풍자로 아주 제격이었다. 아울러 시대를 풍미한 저열한 자본주의와 조폭의 결합을 분노가 스며든 판타지로 재구성해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만난 영화와 분석들 중에 최고로 박종원 감독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꼽고 싶다. 한 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로 생각했던 이의 원작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이 영화에는 한 시대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엄석대와 한병태가 등장을 한다. 한 초등학교에서 마치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는 엄석대에, 서울에서 전학 온 한병태가 온갖 불합리와 권위주의에 대항해서 외로운 도전장을 던진다. 하지만, 온갖 수단과 모략으로 이미 공고해져 버린 엄석대의 체제는 한 개인의 힘으로 전복될 수 없을 정도로 공고하기만 하다. 그 결과, 한병태는 엄석대 일당에게 투항해서 변절의 달콤함을 누린다. 작가가 말하는 비판적 연대야말로 그들의 행악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라는 주장이 귓가에서 맴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에서 조금 가벼운 영화평 정도의 글들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영민 교수가 책에서 사용하는 어휘들은 선뜻 캐치가 되지 않고, 어디에선가 분절되는 느낌이 계속해서 들었다. 예를 들어 “메타적 시선” 같은 경우에 도대체 무슨 뜻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독자들이 이해하기에 좀 더 쉬운 말들을 사용해서 이야기들을 풀어 나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한 가득이다. 아울러, 말미에 실려 있는 개념어집과 한글용어집을 먼저 읽을 것을 권유한다. 이 부분을 먼저 습득하고 나서, 책을 읽으면 부러 사전을 찾는 수고를 덜 수가 있고, 곳곳에서 튀어 나오는 낯선 단어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

대개 영화는 사람들의 이야기[내러티브]에 근거한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이 부대끼며 빚어내는 어울림의 무늬[人紋,] 바로 그것을 향해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감독은 큐 사인을 외쳐댄다. <영화인문학>을 통해,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 혹은 이미 본 영화들에서 미처 잡아내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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