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자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리 차일드의 그 유명한 잭 리처 시리즈에 드디어 입문을 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이게 바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전범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타부타 군더더기는 빼고 바로, 알짜배기들만 골라내서 서술하는 사실주의 기법의 진수, 게다가 잭 리처라는 그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절대 당황하지 않고 어깨를 움찔하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전혀 문제없어’라고 말해주는 캐릭터는 금상첨화였다.

잭 리처가 1997년에 리 차일드와 함께 첫 방랑길에 들어선 이래 모두 12편의 작품들이 소개가 되었다. 그 말인 즉은 해마다 리 차일드는 잭 리처 시리즈를 발표해 왔다는 말이기도 하다. 올해 역시 13번째 작품인 <내일로 떠난>(Gone Tomorrow)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잭 리처의 두 번째 모험의 시작은 시카고의 세탁소에서 시작된다. 정말 기묘한 우연에 얽히게 되면서, 유능하며 미모의 연방수사관 홀리 잭슨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3인조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어떠한 단서도 없이 잭과 홀리는 어디론가 끌려간다.

이후에 전개되는 과정은 홀리의 FBI 동료들과 그녀의 아버지인 합참의장 존슨 장군의 구출작전이다. 하지만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전 미국이 휴일 모드로 돌입한 가운데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홀리를 구하는 대규모작전의 승인불가가 떨어진다. 자, 이제 그녀의 몇 명 안 되는 그녀의 동료들과 존슨 장군 휘하 몇 명의 해병들만으로 그녀를 구출해야 한다.

이야기의 구성은 이처럼 단순하다. 연방수사관이 실종/납치되었고 그녀를 찾아라. 하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고, 납치범들은 왜 그들이 홀리를 납치했는지 전혀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축구를 하다가 십자인대가 파열되어져서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리 차일드는 처음부터 주요 캐릭터에 이런 제한을 두고 게임을 시작한다. 진짜 주인공 잭 리처는 자신뿐만 그녀를 지켜야 한다. 잭, 이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홀리 수사관을 구출해 내라구.

잭 리처의 프로파일은 화려하다. 한 마디로 말해 내추럴 본 솔저(natural born soldier)로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흠잡을 데 없는 군 경력을 가지고 있다. 다른 군인들은 한 개도 받긴 힘든 다양한 훈장들을 받았다. 앞으로 시리즈에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특등사수로서의 출중한 능력은 해병 사격대회인 윔블던에서 비(非)해병으로 유일한 우승전력이 증명해준다. 게다가 시계가 없어도 경험치에 의해 시간을 계산해내고, 자다가도 알아서 척척 일어나는 모습은 거의 완벽 그 자체였다. 뭐 이런 주인공이라면 어느 추리소설작가라도 한 번 탐내볼만 하지 않은가.

책의 표지에 등장하는 총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은 민간인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고, 자신들의 인구보다도 많은 몇 억정의 총기들이 거래되고 있는 오늘날의 미국을 만든 원인이 무엇일까 하고 말이다. 그건 미국 수정헌법 제2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무기휴대의 권리”에서 민간인들의 총기 소지 권리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내용은 <탈주자>에서 중요한 갈등 요소로 등장하게 되는 몬태나 민병대와 같은 무장단체의 존립기반이기도 하다. 얼핏 보면 과대망상에 빠진 시대착오적인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책에서도 언급이 되다시피 다섯 명의 한 명 꼴로 미국인들은 정부에 반대해서 분연히 저항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리 차일드는 말하고 있다. 그가 선량한 미국인들을 선동하려는 게 아니라면 근거가 있는 발언이길.

이제는 좀 진부한 느낌도 없지 않지만 여전히 유효한 내부의 배신이라는 전통적인 소재 역시 스토리 전개에 활력을 더해 준다. 도대체 정체와 그 목적을 알 수 없는 단체에 억류되어 있는 잭 리처는 자신과 홀리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리고 연방수사관들의 움직임이 적들에게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직 군수사관 다운 직감으로 파악해낸다. 이 미스터리는 소설의 마지막 장까지 독자들의 긴장을 유지시켜 주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준다.

마지막으로 잭 리처의 적들이 난공불락의 아지트로 삼은 몬태나 주 요크 마을에 대한 설정이었다. 구글 맵으로 해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요크 마을과 그 주변을 위성사진으로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시카고에서부터 요크 마을에 이르는 대략적인 이동 경로가 한 눈에 들어왔다. 마치 현장 스케치를 하듯 절묘하면서도 디테일한 작가의 묘사가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그런 곳이라면 충분한 자금과 무장을 갖춘 어느 조직이 연방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이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을까.

역시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떠도는 방랑자답게 사건을 모두 해결하고 복수까지 마무리한 뒤에, 홀리와의 짧은 로맨스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어깨를 한 번 움찔해 보이고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미련 없이 다시 방랑길에 나서는 잭 리처.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뱀다리] 책 표자에 “사립탐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탈주자>를 보면서 잭 리처가 사립탐정이라고 추리할만한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해내지 못해서 책을 읽는 내내 눈에 거슬렸다. 그 누가 잭에게 사건의뢰를 했던가? 굳이 그를 특정직업군에 분류하고 싶다면 자신이 말한 대로 문지기(bouncer)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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