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후회남
둥시 지음, 홍순도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대략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부피에 심적 부담감이 엄습해 왔다. 띠지에 둘러져 있던 “엽기 코믹 화제작”이라는 말이 준 기대감은 당황한 느낌으로 전이가 됐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이런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가 있었다. 역시 재밌는 책은 두께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표지에 등장하는 주인공 쩡광셴(曾廣賢)이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틀어져 있는 일러스트가 보인다. 마치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뒤안길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으로, 이 책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후회”와 명징한 접점을 이룬다. 1966년 생으로 소위 ‘신생대(新生代) 작가’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작가로 알려진 둥시(東西)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는 <언어 없는 생활>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되었다.

주인공 광셴(廣賢)의 이름에서 보이듯이 그가 ‘널리 현명’했다면 이 책은 아예 이 세상의 빛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부주의한 언행으로, 더 속되게 표현하자면 그 놈의 세치 혀 때문에 갖은 사건 사고를 만들어낸다. 어느 날, 우연히 흘레붙은 개들을 구경하던 광셴의 아버지 쩡창펑은 지난 10년간 섹스리스(sexless)한 삶의 보상을 엉뚱하게도 이웃 처녀 자오산허를 통해 해결하려 든다. 이 광경을 목격한 광셴은 첫 번째로 사고를 치게 된다.

광셴은 이 사실을 바로 자오산허의 오빠이자 중학교 교장인 자오완녠에게 일러바친다. 결국 당시 중국을 휩쓸던 문화대혁명 기간에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는 광셴의 아버지. 설상가상으로 그의 어머니에게 집적대던 동물원 원장의 비행을 목격한 광셴은 어머니를 모욕하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동물원 호랑이게 몸을 던진다. 이 와중에 여동생 쩡팡마저 잃어버리고, 그야말로 쩡씨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만다. 풀려난 아버지 창펑은 자신을 밀고한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말에 분노한다. 광셴은 이 화근덩어리인 자신의 입을 가차 없이 손으로 내려친다. 그리고 이 장면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독자들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장면이 될 것이다.

이런 광셴을 동정하는 소녀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샤오츠. 당시 대유행하던 샤팡(下枋)을 하기 위해 멀리 농촌지역으로 광셴도 갈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샤오츠도 자원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특유의 우유부단을 발휘해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간다. 샤오츠의 적극적인 유혹을 아버지의 부정으로 인한 트라우마 덕분인지 그는 목석처럼 이겨낸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뭐 늘 그렇지만 떠난 버스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 천신만고 끝에 샤오츠를 찾아가지만, 샤오츠는 같이 하방한 위바이자와 스캔들로 한차례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야말로 엽기일색이다. 동물원에서 같이 일하는 자오징둥과 그가 기르는 개 나오나오의 부적절한 관계를 너무 크게 부풀려서 그만 자오징둥을 자살하게 만들고, 친구 위바이자의 충동질에 그만 자오징둥의 사촌누나인 장나오의 방에 침입했다가 강간범으로 몰려 자그마치 10년간의 형무소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동물원 동료인 루샤오옌과의 연애로 무모하게 탈옥을 시도하다가 잡혀 추가형을 선고받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의 동료 리다파오의 탈출을 밀고해서 자신의 형기를 단축시키기도 한다. 그냥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좋으련만, 참지 못하고 자신의 배신을 고백했다가 리다파오로부터 모욕을 받기도 한다.

물론 이런 그의 엽기 행각들과 주체할 수 없는 입놀림으로 그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광셴의 교육효과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어쩌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될 말들만을 해서 고난 속으로 뛰어 드는지 책을 읽는 내내 혀를 찼다. 장나오의 무고로 10년간 감옥살이를 했으면서도, 자신을 옥바라지하고 아버지 창펑의 수발을 든 루샤오옌 대신 장나오를 선택하는 광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런 그를 말리지만, 그는 항상 엉뚱하고 잘못된 선택만을 해댄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장나오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지도 못한다. 이 장면에서는 미국 영화 <40살까지 못해본 남자>의 주인공 생각이 불쑥 들었다.

중국 문학에서 문화대혁명을 빼놓고서는 어떤 이야기도 전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로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긍정적이기 보다는 부정적으로 말이다. 소설 <미스터 후회남>에서도 어김없이, 문화대혁명의 여파를 엿볼 수 있었다. 많은 중국 소설들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성장통 역시 빠지지 않았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다시 장년으로 넘어가는 주인공 광셴의 변신은 중국 현대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자본가 계급의 아들로 태어나, 노동자들이 대우를 받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의 처지는 마치 광셴이 장나오, 룻샤오옌 그리고 샤오츠 사이에서 갈팡지팡하는 계급적 고뇌의 승화로 대체된다. 아예 모택동 사후 소위 4인방이 국정을 농단하던 시절은 광셴의 암흑의 교도소에서의 교정생활로 갈음해 버린다. 그는 죄 없이 무고로 감옥에서 10년의 청년을 썩어 버린 것이다. 이것 역시 문화대혁명 후,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반강제로 시골이나 농촌에서 하방된 지청(지식청년)들의 모습이었다.

거듭되는 친구와 사랑한다고 믿었던 여인으로부터 배신, 그리고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꼬이기만 하는 광셴의 인생은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부주의한 언행으로 비롯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인생이 꼬일 수가 있을까. 이것 역시 문화대혁명기의 대다수 중국 인민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떤 방향성의 제시도 없이,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끔찍한 폭력만이 난무하고, 서로를 믿을 수가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광셴이라는 개인을 통해 우회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한편으론 아버지의 부정을 비난하며, 청교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광셴은 미녀 장나오를 몰래 훔쳐보는 관음증으로 대변되는 이율배반적인 환상을 품기도 한다. 이것 역시 사회주의 시스템 아래서, 서구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배척하던 물질주의에 대한 인민들의 멈출 수 없는 동경만큼이나 모순적인 모습이었다.

작가 둥시가 빚어내는 한 편의 추리소설을 연상케 하는 치밀한 구성과 적재적소의 캐릭터 배치 등은 감탄할 만했다. 예를 들어, 광셴은 장나오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미 둥시는 사전에 미리 철저한 준비를 다 해두었다. 그리고 한 번 등장한 인물들은 쉬이 흘려보내지 않고, 빈틈없는 인과관계로 묶어 놓기도 한다. 둥시가 창조한 광셴이라는 걸출한 못난이를 통해 쉴 새 없이 퍼뜨리는 해학과 익살의 바이러스는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도 여전히 머릿속에서 준동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경고 하나! 너무 밤늦게 읽기 시작하지 마라, 새벽까지 잠을 못자는 수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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