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처럼 사랑을 요리하다 - 식탁 위에 차려진 맛있는 영화 이야기
송정림 지음, 전지영 그림 / 예담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바로 의식주 세 가지일 것이다. 영화나 책을 안보고는 살 수 있어도 밥 안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개체유지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음식과 가장 대중적인 문화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의 진중한 만남이 바로 이 책 <영화처럼 사랑을 요리하다>에서 펼쳐진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영화소개 코너를 맡았었다는 방송작가 출신의 송정림 씨와 일러스트 작가로 이름난 전지영 씨가 만나 모두 해서 29편의 영화와 그 영화를 특징짓는 음식들을 소개해 주고 있다. 물론, 음식보다는 영화가 주다. 모두 4개의 각각 장에 선정된 영화들을 아주 적절하게 배분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품새가 마음에 들었다.

영화들을 다룬 책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스포일러성 내용 때문에, 작가는 아주 친절하게도 책의 시작에 나오는 “작가의 말”을 통해 아직 보지 않은 영화가 있다면 그 영화를 먼저 보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몇 편을 제외하고는 아주 최근작이 아닌 좀 오래된 영화들이었다. 만약 지금까지도 그 영화들을 보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못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부담 없이 책장들을 넘길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을 보면서 아직 못 본 영화들의 경우에는 시간을 내서 꼭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이미 그전에 본 영화들이더라도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 영화들의 경우에는 역시 시간을 내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게 만들어 주었다. 그 정도로 송정림 작가는 각 영화들에서 정말 엑기스 같은 핵심들만을 꼭꼭 짚어내고 있었다.

그 많은 영화들에 대해 모두 설명을 할 수가 없으니 두 개로 분류해서 인상적이었던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우선 기존에 내가 봤던 영화들과 그렇지 않은 영화들로 나눌 수가 있겠다. 전자에 해당하는 영화중에 트란 안 훙 감독의 <그린 파파야 향기>와 <제8요일> 그리고 <바그다드 카페>가 있다. 1993년에 발표된 <그린 파파야 향기>의 감독 트란 안 훙은 베트남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자랐다. 100% 프랑스의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이 영화는 극단적인 탐미주의 경향을 띠면서, 전통적인 시네마 내러티브를 배격한다. 어느 부잣집에 하녀로 들어간 무이는 수평 카메라의 트래킹을 따라 성장한다. 숨 막힐 듯한 갑갑하기 그지없는 공간의 표현들은 억압적인 프랑스 식민치하의 1950년대 베트남의 현실을 대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소 신파조의 스토리텔링은 감독의 경향 탓에 그다지 중요성을 띠지 못한다. 이미지, 오로지 12년이 지난 지금에도 삼단 같은 머리를 빗고 있던 무이의 이미지만이 잔상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물론 마무리는 간단하면서도 손이 많이 가는 월남 쌈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런 반면, <제8요일>에서는 약간의 판타지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전형적인 시네마 내러티브(이야기체 영화) 중심의 전개가 이루어진다. 만사태평한 다운증후군 환자인 죠지(파스칼 뒤켄)와 하루하루를 정말 빡세게 살아가는 세일즈 강사 아리(다니엘 오떼이유) 듀오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둘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의지하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물론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불행한 가정사를 지닌 아리가 항상 순수청년 죠지에게 도움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 아리는 죠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내적 상처들을 치유한다. 이번 사용되는 음식은 감자튀김, 프렌치프라이다. 보통의 경우, 감자튀김이 메인 디시로 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없으면 허전한 존재, 안 먹으면 무언가 빼놓은 듯한 느낌이 드는 바로 그 점이 감자튀김의 포인트다. 아마 죠지와 아리의 관계도 서로에게 그런 존재감으로 다가 오지 않았을까?

첫 번째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마지막 영화로 <바그다드 카페>를 꼽고 싶다.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예전의 기억들을 되살릴 수가 있었다. 라스베이거스, 사막 그리고 흑인 브랜다 아줌마가 경영하는 다 낡아 빠진 “바그다드 카페”. 여기에 역시 뜬금없이 독일 아줌마 야스민이 등장한다. 소통이 없는 공간에서 야스민은 소통의 부재로 인해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들을 하나둘씩 풀어나가는데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진심을 가지고 다가간다면 누구라도 마음의 문을 열 것이다. 영화에서 야스민은 말이 아닌 실천으로 보여 준다. 야스민은 마술처럼 “바그다드 카페”를 사막의 오아시스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렇게 소원하던 브랜다와의 관계에서도 동지애 적으로 뭉친 끈끈한 유대감이 절로 흘러넘친다. 이렇게 행복한 모두에게, 야스민이 드리핑 하는 진한 커피 한 잔은 치유의 묘약처럼 다가온다.

후자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전적으로 작가의 해설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였다. 에디뜨 피아프의 일대기를 그린 <라 비 앙 로즈>와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가 이에 해당한다. 에디뜨 피아프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얘기를 들으면서, 동명의 타이틀곡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은 이제 미각뿐만 아니라 청각까지도 요구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장밋빛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보였지만, 샹송가수가 아닌 개인으로서 그녀는 언제나 고독하고 외로웠다. 그래서 그녀는 끊임없이 사랑하고자 했었나 보다. 그녀가 이 세상의 고(苦)를 극복해내는 유일한 방법은 노래였고, 무대는 그녀만을 위한 탈출구였다. 사랑했지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이었던 권투선수 마르셀을 위해 그녀는 아침에 토스트를 준비한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환상이었나 보다.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삶의 아이러니를 대변하는 것 같다. 시한부 인생의 주인공 정원(한석규)과 그 사실을 모른 채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다림(심은하).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모두 유한한 사랑을 하면서도, 그 사랑이 영원하길 바란다. 이 영화의 요리로는 정원의 아버지가 끓이는 구수한 된장찌개가 등장한다. 진심으로 아들을 사랑하지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는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된장찌개를 끓인다. 그 된장찌개에는 한없는 부모의 사랑과 회한, 아쉬움과 같은 감정들이 녹아 있다.

아마 음식이나 식사 장면이 나오지 않는 영화는 없을 거다. 하지만 대개 영화의 등장하는 음식이나 식사 장면들에는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송정림 작가는 다른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바로 이런 점에 착안을 해서, 각 영화들에 등장하는 음식 혹은 요리 같은 요소들을 족집게처럼 착착 뽑아낸다. 그런 탁월한 선택과 분석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의미들은 그야말로 독자들에게는 진수성찬이다.

일러스트 작가 전지영 씨가 그린 영화들의 중요한 장면, 포스터 그리고 말미에 등장하는 요리들은 해체와 분석의 과정을 거쳐 재창조된 구분된 이미지들의 전형이다. 어떤 경우에는 수많은 글보다도 단 한 하나의 일러스트가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기도 한다.

그동안 영화와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영화처럼 사랑을 요리하다>처럼 본격적으로 미각의 형상화에 도전한 책도 없는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내러티브에 취했었고, 다 읽고 나서는 형상화된 미각에 대한 갈망이 입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레시피에 나오는 대로 무어라도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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