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버트 그레이프
피터 헤지스 지음, 강수정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책보다 먼저 영화를 접하게 됐다. 사실 영화를 볼 때만 하더라도 책을 원작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소설 <길버트 그레이프>는 피터 헤지스가 1991년에 발표한 책으로, 영화는 2년 뒤에 스웨덴 출신의 감독 라세 할스트롬이 메가폰을 잡고 만들어졌다. 영화도 괜찮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책을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역시 영화의 요소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말하는 현실세계의 가시성이, 책이 주는 문학적 감성을 도저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아이오와 디모인 출신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보통 처음 만나게 되는 인사인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을 때 선뜻 어디 출신이라고 말하길 꺼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시골 촌동네인 디모인보다도 훨씬 더 시골인 엔도라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주인공은 올해 24살로 램슨 식품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가족들을 부양하는 길버트 그레이프다. 한창 세상에 대한 꿈을 꿀 좋은 시절에 길버트는 가족이라는 굴레에 철저하게 매여져 있다.

피터 헤지스는 길버트와 더불어 그의 17살 난 지적 장애우 동생 어니를 동시에 등장시킨다. 길버트는 진심으로 자신의 동생을 사랑하고 있지만, 대개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그 사랑을 표현할 줄 모른다. 하긴 큰누나 에이미 역시 가족에 대해 최고의 사랑과 헌신을 베풀지만 그 감정들은 어느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17년 전에 자살한 아버지와 그 이후 외출도 하지 않은 채 집에서 폭식과 운동부족으로 하루가 갈수록 살이 쪄만 가는 엄마 보니가 있다.

이미 그레이프 집안의 큰 아들 래리는 집을 떠났고,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어니의 생일에만 얼굴을 비춘다. 길버트의 또 다른 누나 제니스는 그레이프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항공사의 스튜어디스로 근무하고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막내 엘렌은 길버트에게 또 다른 골칫거리다. 이 7명의 그레이프들이 빚어내는 슬프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들은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해 진지한 질문들을 슬며시 내어 놓는다.

그리고 길버트에게 남을 사랑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미스터리한 소녀 베키가 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굴레 속에서,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그런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길버트에게 베키의 존재는 ‘천사’ 그 자체이다. 그녀의 키스 한 번에 길버트는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감에 젖어든다. 세상이 길버트를 속일지라도, 그는 그녀의 존재로 인해 행복해 한다.

영화에서는 줄리엣 루이스가 베키 역을 맡았는데, 책과 상당히 다른 이미지여서 조금 실망스러웠다고나 할까. 영화에서는 좀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면서도, 미스터리한 점을 가진 역할로 그려지는 베키가 영화에서는 그 세부묘사에 있어서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그런 캐릭터상의 문제라면 아예 길버트의 또 다른 누나인 제니스는 삭제되어 버렸다. 그리고 길버트의 존재감 없는 삶을 더 한층 초라하게 만드는 엔도라의 유명인사 랜스 닷지 역시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영화나 소설에서나, 성인이면서도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진 길버트의 묘사는 탁월했던 것 같다. 물론 영화에서 주연 배우 역할을 맡은 자니 뎁의 캐스팅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지적 장애우 어니 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이 연기를 위해 실제 지적 장애우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고 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길버트의 관점에서 진행하는 이야기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자신도 형 래리나 누나 제니스처럼 엔도라를 떠나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갈등을 어니의 18번째 생일 파티의 시간적 배열과 동일선상에 배치하면서 멋지게 그려내고 있다.

그레이프 가족이 보여 주는 문제들은 그야말로 실마리를 풀 수 없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서 어디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롯된 불행의 그림자는 엄마 보니의 비만 그리고 통제 불능의 지적 장애우 어니의 존재로 나머지 그레이프들에게 그늘을 드리운다. 가족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살려고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 염증을 내고 있다.

확실히 영화에서는 제한된 상영 시간 때문인지 책보다 진행의 템포가 빠르다.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등장인물들의 풍부한 감정묘사들은, 비주얼이 보여주는 극적 요소들로 대체된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는 마을에 있는 워터타워에 어니가 두 번이나 올라가는 것으로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보안관이 어니를 단 방에 구치소로 끌고 간다. 그리고 피터 헤지스가 지적했듯이 가장 중요한 장면 중의 하나로 꼽은 어니 일병 구출작전은 지난 3년간 외출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고래엄마 보니가 지휘한다. 사실 이 장면은 소설보다는 영화의 연출이 뛰어났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푸드랜드와 버거반으로 대표되는 물질만능주의 역시 대량소비 시대에 편리와 작은 마을 엔도라 고유의 정신이 충돌한다. 길버트의 고용주인 램슨 식료품점의 사장 램슨 씨는 양심과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지역 공동체와 애환을 같이 한다. 하지만 라이벌 푸드랜드는 오로지 판매와 능률만을 추구한다. 어쩌면 그런 푸드랜드에 길버트가 출입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니가 에이미 누나가 정성껏 만든 자신의 18번째 생일케이크를 망쳐 놓자 어쩔 수 없이 생일 케이크를 사러 갔다가 램슨 씨와 마주치는 장면 역시 삶의 아이러니를 정확하게 포착해 내는 순간이었다.

겉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작은 마을 엔도라지만, 그 안에서도 역시 요지경 같은 인간사가 펼쳐지는 것도 빼놓을 수가 없겠다. 마을에 유일한 보험회사 사장인 켄 카버는 자신의 직원 멜라니와 외도를 하고, 그의 부인 베티 카버는 7년째 길버트와 불륜 관계에 있다. 엔도라 주민들이 다녔던 고등학교는 학생 수가 적다는 이유로, 폐쇄되고 결국 소방연습으로 불타 버리게 된다. 잊혀 가고 사라져 가는 장소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 꿈도 희망도 요원할 따름이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길버트 그레이프>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가정이길 소망한다. 그레이프 가족은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피폐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상적으로 보이는 가정들도 속사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적 장애우 어니가 더러운 몰골로 트램펄린에서 펄쩍펄쩍 뛰며 행복해 하는 순간이야말로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길버트의 천사 베키는 길버트에게, 자신을 사랑해야 다른 이들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아주 쉬운 비밀을 알려준다. 쉬운 길을 멀리 돌아온 나그네처럼 길버트는 자신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삶의 행복들을 찾아 가기 시작한다.

지금도 자신들이 처해 있는 수많은 고민들과 씨름하고 있을 길버트들에게 격려 한 마디.
세상이 너를 속일지라도 힘내라구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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