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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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사놓고서도 한 동안 읽지 못한 채 나의 책상머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 책을 손에 집어 올리는 순간 레오와 에미가 글로 빚어내는 사랑과 질투, 시기, 증오 그리고 의심으로 복합된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느꼈다.

그렇다, 잡지 구독을 끊기 위해 레오 라이케에게 에미가 보낸 이메일이 계기가 되어 그 둘은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언제나 모든 사랑의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관계의 발단이 된다. 레오는 언어심리학자고, 에미는 웹디자이너란다. 직업 따위가 무엇이 중요한가. 그 둘은 끊어질 듯하면서도 위태롭게 지속되는 이메일을 통해 쉴 새 없이 소통을 시도한다.

레오는 최근의 전 애인이 되어 버린 마를레네와의 관계로 인해 새로운 관계를 꿈꾼다. 유부녀인 에미는 ‘완벽한 가정생활’ 가운데서도 그녀만의 ‘외부세계’를 원한다. 그렇게 그 둘은 자연스러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고, 서로에 대한 조심스런 탐색전에 나선다. 온라인을 통한 익명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단계가 있다. 그건 바로 직접적인 대면.

레오보다 에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실제로 만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한편, 옛 연인에게 버림 받은 레오는 새로운 현실세계에서의 관계 대신이 자신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외부세계’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화성에서 온 여자는 현실을 원하고, 금성에서 온 남자는 자신만의 환상만을 원한다. 에미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이 두 명의 환상적인 메일 파트너들은 글로 만든 유토피아 속에서 어떠한 구속 없이 자유롭게 유영한다.

독일 출신의 작가 다니엘 글라타우어는 현실세계에서 누구나에게 일어날 법한 일을 가지고 이메일 대화체를 이용해서, 멋진 판타지를 구축해냈다. 관계의 시작에서부터 결말에 이르기까지 레오와 에미의 대화들은 어쩔 때는 초단위로 또 어쩔 때는 며칠씩 걸리는 상호작용을 거쳐 서로에 대한 감정들을 점증시킨다. 결국 우리의 주인공들은 불가피하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거다. 그들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말이다.

물론 몇 번이 아슬아슬한 만남의 위기들이 스쳐 가지만, 작가는 뻔뻔하게도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 곳곳에 멋진 부비트랩들을 설치해 두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미가 레오에게 자신의 본심과는 달리 소개시킨 미아다. 메일을 쓸 때나 혹은 쓰지 않을 때 그리고 모든 순간마다 서로를 생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만날 수가 없다. 아니 그 후의 결말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다. 이기적인 사랑의 속성상, 상대방의 감정보다는 내가 만든 상대방에 대한 환상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이야기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조금은 급작스러운 결말에 당황스럽긴 했지만, 누구나 친밀한 소통을 원하면서도 타인과의 소통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 속에, 훅하고 입김으로 불어 버리면 날아가 버리고 말 것 같은 가냘픈 사이버 사랑의 칼날 같은 긴장감과 애절함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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