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가우초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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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참을 수 없는 가우초>를 사서 허겁지겁 <두 편의 가톨릭 이야기>만 쏙 골라 읽었다. 어느 소년이 눈밭을 맨발로 고행하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를 존경하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 수도사는 방금 수도사와 아이를 살해한 흉악범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따라 붙은 것을 눈치채고는 그마저도 클린할 생각이었지 아마. 볼라뇨는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에 담긴 서로 교차되는 성속의 내러티브를 즐기는 모양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볼라뇨를 읽는 이유는 많다. 그 중의 하나는 아마도 니힐리즘의 정수가 아닐까. 내가 절대 가볼 수 없는 팜파스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는 전직 판사 아저씨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팜파스에 더 이상 말을 볼 수가 없다. 소 대신 팜파스의 주인이 된 토끼를 덫으로 잡는 이야기는 생경하게 다가온다. 경제난과 인플레이션으로 그동안 애써 모은 자산이 종잇조각이 되자 판사는 쇠락한 시골 농장을 찾아 가우초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우리 식으로 하면 귀촌 정도 되려나. 아니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는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을까 싶지만, 삶의 단면은 언제나 이해할 수도 그리고 설명도 불가할 순간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도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일부러 찾아온 문인 아들과 지인들에게 육즙이 풍성한 소고기 대신 토끼 고기를 대접하는 늙수그레한 가우초들의 이미지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가우초의 삶을 사는 주인공의 꿈은 인디오 여자와의 합방으로 확정지어진다.

 

<경찰 쥐> 페페는 자꾸만 메가 픽션 <2666>을 연상시켰다. 쥐들은 동족을 죽이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수도에 거주하는 유능한 형사 쥐 페페는 연달아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 해결에 나선다. 페페의 목적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첫 번째 희생자는 재갈에 물린 채 아사되었다고 했던가. 그 다음에도 쥐들의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에게 날카로운 자상을 입고 연달아 죽은 일련의 시체들이 발견된다. 페페 경찰 쥐는 범죄의 패턴을 연구하면서 아무래도 같은 쥐의 소행이라는 심증을 굳혀 간다. 그리고 결국 범인으로 지목된 녀석과 대결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 역시 동족 살해라는 끔찍한 범죄의 당사자가 된다. 이런 역설이 있을 수가 있나 그래. 어쨌든 페페 형사는 족제비라는 강력한 포식자의 위협에 직면한 동족의 S.O.S. 요청을 무시하지 않고 구조하기 위해 달려간다.

 

자신의 작품을 한 없이 베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프랑스 감독 모리니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 알바로 루셀로트의 기묘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원작자에게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은 표절행위를 문학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용서할 수 있냐고 볼라뇨는 독자들에게 묻는 것 같다. 게다가 요즘처럼 원전의 영화화로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루셀로트는 표절감독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팬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같은 상황이 소설가 볼라뇨 씨에게도 벌어진다면 그는 통 크게 자신의 팬의 행동을 ‘뭐,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길 수 있을까. 나라면 아마 그러지 못하고 나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전투에 분연하게 나서지 않을까 싶다만.

 

나머지 두 편은 간부전으로 죽어가던 볼라뇨의 묘비명 같은 글이라고나 할까. 세상에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다면 무슨 낙이 있겠는가? 작가 본인의 과도한 섹스에 대한 직접 체험도 궁극의 깨달음에 대해 한몫 한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추론도 해보게 된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섹스에 집착하는 장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도 본 션 펜 주연의 <데드맨 워킹>에 그런 장면이 나오는지 미처 몰랐다.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의 시를 인용해서 그리하여 마지막 단계로 작가는 여행을 추천했지 아마도. 하지만 여행 역시 쁘띠 부르주아에게나 해당한 일이 아닐까? 여행을 하기 위한 금전적 여유와 시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어려서 여행할 적에는 돈이 없었고, 지금은 돈도 시간도 없다는 말이 왜 이렇게 실감이 나는지 모르겠다. 심연에 도달해서 ‘해독제’를 찾기 위해 우리는 ‘섹스와 책과 여행을 탐험’해야 한다는 볼라뇨의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계를 겨냥한 신랄한 비판인 <크툴루 신화>는 작가 스스로 지독한 문학 소비자였던 시절을 바탕으로 해서 재구성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라틴 아메리카와 스페인 문화권의 한다하는 작가들을 총망라한다. 노벨상 수상자로 공통분모를 형성한 만델라와 가비토 그리고 바르가스 요사에 대한 저격은 붐 세대를 끝장내려는 인프라레알리스모의 일원다운 패기를 보여준다. 볼라뇨는 현존하는 최고의 라틴 아메리카 작가로 알란 파울스를 꼽고 있는데, 아쉽게도 국내에는 소개된 그의 작품이 하나도 없구나.

 

내가 볼라뇨를 꾸준하게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는 하나의 창구이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로드리고 프레산과 지금 한창 빠져 있는 호르헤 볼피(<클링조르를 찾아서>는 당연 올해의 발견이다!!!)를 알게 되지 않았던가. 그 외에도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숱한 작가들의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대중에게 소비되지 않는 책을 쓰기 위해 문학가는 모름지기 산더미 같은 책과 씨름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게 아닐까. 그렇다, 책은 소장하는 게 아니라 읽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책의 창조자인 문학가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존경 받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볼라뇨의 주장인데, 그럴려면 정신적 창녀가 되는 것도 마다해서는 안된다는 걸까? 죽음을 앞둔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진격의 작가지만 볼라뇨도 그 선까지는 넘지 않은 것 같다. 베스트셀러를 경멸하면서도 독자들에게 베스트셀러라도 읽으라는 권면은 정말 가슴 찡하게 다가왔다.

 

볼라뇨가 부린 주술대로 한국의 어느 독자는 좀비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글을 찾아 읽게 되었다. 책쟁이라면 호르헤 볼피의 <클링조르를 찾아서>는 반드시 읽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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