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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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 할 책이 있고, 읽어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며 또 읽고 싶은 책이 있다. 그 중에서 오늘 내가 읽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읽어야 할 그런 책이었다. 왜냐고? 돌아오는 주말 달궁 독서모임 책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난 이 책을 이미 8년 전에 한 번 읽었다. 재독의 경험은 이미 가본 길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그런 체험이기도 하지 않은가. 부담 없이 읽는 재미로는 최고였다.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생각한 저자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는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시인이자 정치인 그리고 공산주의자 파블로 네루다에게 옛 연인들에 대한 사연을 캐내는 역할을 맡은 구식 기레기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아직 발표하지도 않은 자신의 소설의 서문을 써달라는 뻔뻔함도 지녔다. 그렇지 미래의 작가가 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물론 둘 다 실패했다고 한다.

 

소설의 배경은 네루다가 실제로 살았던 이슬라 네그라다. 그리고 화자는 실패한 전직 어부이자 마을의 유일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네루다에게 편지배달 업무를 맡은 17세의 마리오 히메네스다. 그저 수도 산티아고의 아가씨들이나 꾀어 볼까 하는 가벼운 생각으로 대시인에게 접근하는 소년의 모습에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시인의 시집을 사서 헌사를 받는 장면에서는 대가를 존경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마리오의 인생에서 결정적 장면은 네루다와의 만남만큼이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동네 주막집 아가씨 베아트리스 곤잘레스와의 만남이다. 그렇지, 모름지기 사람이 사랑에 빠져야 시인이 되는 법이지. 그동안 네루다를 통해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해서, 그러니까 메타포를 통해 마리오는 단박에 베아트리스의 마음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 열렬하게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마을의 어부들과 마리오와 달리 빨갱이시인과 아옌데 후보를 격렬하게 싫어하는 기독교민주당 지지자인 로사 곤잘레스 여사는 마리오와 베아트리스의 사이를 막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 여기서 바로 비유와 상징이 등장할 차례인가. 민중연합으로 대변되는 정치세력의 민중에 대한 구애가 엇나가기 시작하는 지점이라고 해야 할까.

 

당 중앙으로부터 대통령 후보로 나서 달라는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네루다는 폭풍 같은 선거 전야에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후보로의 단일화에 합의하고 이슬라 네그라로 귀환한다. 그리고 마침내 칠레 인민연합은 평화로운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라는 역사상 최초의 거사를 성공시킨다. 물론 반대편 진영의 멀끔하고 신사인 척하는 랍베 하원의원이 등장해서 호르헤 알레산드리 후보를 지지하며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선거 승리의 열광에서 침울한 나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결말 부분에 등장해서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민중연합의 선거 승리로 칠레 인민들에게 과연 행복한 나날들이 주어졌을까? 천만에 만만에 콩떡이다. 가톨릭, 언론 그리고 기득권 계층은 선거가 끝난 뒤 3개월부터 아옌데 정권의 전복과 대통령 하야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막강한 반정부 세력의 카르텔이 보여주는 위력은 대단했다. 아옌데 정권을 라틴아메리카에서 자국 이익을 추구하는데 눈엣가시로 생각한 미국의 정치경제적 사보타주 및 경제 금수조치와 우파들의 매점매석으로 칠레 경제를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민중들을 현혹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먹고사니즘을 동원한 공격이 아니겠는가. 예전보다 정말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는. 지금 우리가 바로 목격하고 있는 장면들이라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언제부터 지들이 그렇게 자영업자들을 걱정했나 그래. 국가주도 경제성장이야말로 신자유주의 경제의 금과옥조가 아니었나?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 피해일 수밖에 없다고 외치던 이들이 틈새를 보고 파고드는 장면에 정말 아연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마리오는 베아트리스와의 결혼에 성공하고, 호랑이 같은 장모와 찰떡궁합을 자랑하던 연인에서 먹고사니즘의 열혈전사로 변신한 아내와 파블로 네프탈리를 부양하기 위해 파리 대사로 떠난 네루다 씨에게 편지배달을 하는 대신, 장모가 경영하는 주막집 주방장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리고 연달아 전해진 네루다 시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국가적 경사를 맞이하면서 소설을 절정으로 치닫는다. 군부와 미국 CIA 연합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군사쿠데타의 물밑작업을 과연 그들이 알 수 있었을까? 좌파연합의 선거 승리와 네루다의 노벨문학상으로 마리오로 대변되는 민중들이 고무되어 있는 동안, 반동 세력들의 조직적 규합 역시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가던 칠레 경제의 추락은 마리오와 장모가 경영하던 숙박 업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독교민주당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장미와 닭고기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닭고기를 고를 유물론자였던 마리오의 장모는 소고기 품귀 현상으로 야채수프로 대체하면서도 가격을 고수하는 이대로 전진하자는 좌파의 구호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긴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부가 과연 쿠데타 기도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군부세력을 막을 만한 정치적 역량이 있었는 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소설의 전반이 사랑에 빠진 마리오가 거장에게 배운 실력으로 메타포를 구사하면서 연인 베아트리스에게 구애를 하는 자못 유쾌한 장면들이 주를 이룬다면, 중후반으로 가면서부터는 상당히 정치적 이야기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상이 지나가고 나면 언제나 공허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 바로 현실이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니까. 아옌데 정부의 파리 대사가 되어 프랑스로 떠난 네루다 씨를 만나겠다고,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마리오는 돈을 모으고 프랑스어를 배우며 꿈을 놓치지 않는다. 문제는 마리오 2세 파블로 네프탈리의 잦은 병치레 때문에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는 점. 그리하여 파리에서 네루다가 보낸 편지와 추신 역할의 현대 문명의 이기라고 할 수 있는 카세트 레코더에 담긴 네루다의 육성이 도착하게 되면서 마리오는 비로소 네루다의 진정한 친구이자 동지로 거듭나게 된다.

 

이렇게 절정에까지 도달했으니 그 다음은 추락의 시작이려나. 1973911일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는 전복되었다. 그리고 네루다는 중병에 걸려 이슬라 네그라로 돌아온다. 군인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아옌데 사후 좌파 세력의 구심점으로 활동할 수 있는 네루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 외부와의 모든 접촉이 차단된 네루다를 위해 우리의 주인공 마리오는 그에게 보내진 전보와 편지들을 암기해서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바로 그 장면에서 이런 게 정말 진정한 우정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루다는 결국 쿠데타 발발 이후 12일 뒤인 923일 세상을 뜨게 된다. 그 뒤 마리오를 찾아온 운명은 어쩌면 비극의 연장선일 지도 모르겠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는 대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이슬라 네그라 출신 우편배달부와의 있을 법한 이야기에 많은 것을 담아냈다. 프롤레타리아 마리오가 어떻게 해서 칠레 최고의 지식인과 우정을 쌓아 나가게 되는 건지 계급을 초월한 진정한 우정의 본질을 타격한다. 사랑에 눈먼 발칙한 청년은 네루다의 시를 인용해 가면서, ‘뚜쟁이로 자신의 연애사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 마리오의 패기는 젊은 시절 기자로서 네루다를 찾아 스캔들에 가까운 이야기를 캐내려고 한 자신의 임무와 쓰지도 않은 소설의 서문을 써달라고 했던 본인의 실제 경험담과 묘한 동조를 이룬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사랑하지만, 정치인으로 네루다의 의견이나 주장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는 로사 곤잘레스의 의견은 또 어떠한가.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칠레 부유층 여성들이 냄비를 들고 나서서 시위하는 장면도 역설적이다. 어쩌면 저자는 그만큼 아옌데 정부가 구사하던 사회주의 정책에 대해 불만을 가진 민중들도 다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시작은 유쾌발랄했지만, 결론부로 갈수록 불편한 마음이 지배적으로 다가왔다. 결국 우리네 삶은 정치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작가의 강력한 메시지로 받아 들여야 하는 걸까. 어쨌든 8년 만에 다시 읽어도 한 없이 재밌고, 또 한편으로는 슬픈 서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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