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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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 전작읽기를 선언한 이래, 집에 있는 로맹 가리의 책들을 모두 찾아서 읽지도 않을 거면서(아직 차례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도 사실 <새페죽>을 다 읽고 나서 보려고 했다. 그냥 몇 쪽만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재밌더라. 그래서 <새페죽>도 다음으로 미루고 계속 읽었다. 이번 7월은 가히 로맹 가리의 달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다.

 

소설의 화자는 저자 로맹 가리처럼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 초로의 나이(59세)가 된 자크 레니에다.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회사는 사업이 지지부진해서 좋은 가격에 회사 매각을 고민 중이다. 자크는 미국인 갑부이자 호색한 짐 둘리 소유의 은행에 호의를 기대해야 하는 불쌍한 처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둘리보다 애인 로라 수자(22세)와의 관계에서 우위에 서 있다는 점 정도. 그것도 최근 발생한 전립선의 위기로 자존심이 상해 있다. 브라질 출신 젊은 애인을 성적으로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자크는 ‘전립선 변호사’의 권고도 무시한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지켜 보다 보니 문득 영화 <광란의 사랑>이 연상된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영화의 제목이 떠올랐다.

 

이 책이 나온 해는 1975년, 그러니까 로맹 가리 61세가 되던 해였다. 프랑스 문단에서는 한 때 프랑스 문학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었던 대가의 몰락이라고 신랄한 비평을 날렸다. 그가 <자기 앞의 생>으로 두 번째 공쿠르상을 수상한 에밀 아자르라는 걸 모른 채 말이다. 소설 속의 페르소나 자크 레니에처럼 확실히 노년의 로맹 가리는 오십대의 자신과 견주어도 노쇠했다는 느낌이 든다. 전에 읽은 <레이디 L>과 지금 읽고 있는 <흰 개>와 비교해 봐도 그렇다.

 

주인공 자크는 오일쇼크의 여파 탓인지 계속해서 서구 사회에 없는 에너지 자원에 대한 갈구를 서구의 몰락으로 연결시키고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자신의 성적 무능함과 다국적 기업에서 자신의 출판사를 넘길 수밖에 없는 경제적 위기를 동일선상에 올려 놓고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라는 주문한다. 생로병사라는 자연의 흐름을 외면하고 싶은 무신론자의 발악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책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의 적나라한 전개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아마 프랑스 문단에서 그를 불편하게 생각했는 지도 모르겠다.

 

젊은 애인 로라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노년의 자크가 가진 강박은 어느 날 둘이 거주하는 호텔에 침입한 강도이자 ‘안달루시아 야수’ 몬토야(자크는 그를 루이스라고 명명한다)를 고용해서 자신의 성적 대리인으로 삼겠다는 판타지에 젖는다. 자신은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라틴 사람들이나 흑인 혹은 아랍인에 대한 성적 콤플렉스 때문에 그들을 이용하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한 인종주의의 흔적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 와중에 자크는 오랜 레지스탕스 동지이자 지금은 포주로 활약하고 있는 릴리 마를렌을 찾는다. 자신의 생명보험금 4억 프랑을 아들 장피에르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서 모종의 계획을 세우지만 현명한 여인 릴리의 조언으로 계획은 무산된다. 그리고 성적으로 노쇠했건 그렇지 않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하는 애인 로라와 터키건 이란이건 어디론가 먼 곳으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확실히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는 기존의 로맹 가리가 구사한 희망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숭배라는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이제는 더 이상 남성으로 누구에게도 매력적이지 않은, 오래된 레지스탕스 전사의 광휘와 문학가에 대한 일정한 존경심 정도 밖에는 남지 않는 한물간 작가라는 혹평에도 불구하고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프랑스 문단에 묵직한 어퍼컷을 날리지 않았던가.

 

전성기가 지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쇠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주변의 관심은 관계의 소멸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특히 잘 나가던 시절을 경험한 로맹 가리 같은 작가라면 더더욱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다. 지방 밤무대 혹은 미사리 라이브카페에 등장하는 예전 스타 연예인들의 심정이 그랬을까. 난 아직 죽지 않았는데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당신의 승차권>이 <자기 앞의 생>보다 리얼한 로맹 가리의 본모습에 가깝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긴 했지만, 노작가의 넋두리 같다고나 할까. 동정은 하지만 공감까지는 아직 부족한 것 같다. 무려 4년 전에 사서 아직 읽지 않은 책이라니 놀랍다. 읽지도 않았지만 작가의 책을 컬렉션한 것으로도 로맹 가리의 팬이라고 불릴 만하지 않은가. 좀 억지스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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