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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사막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여자, 누경...
누경. 그녀는 사막의 한 가운데 서 있다.
기름지고 비옥해서 씨를 뿌렸다가 곡식을 거둬들이는 농토인 땅이나 건물을 올려 많은 많은 수익을 내는 도시의 땅이 아닌 심심하고 밋밋한 사막의 땅. 그 땅엔 가끔 바람이 불지만 그녀는 언제나 목마르고 쓸쓸하다.
기다림과 목마름이 계속되던 그녀의 삶 속에 "같이 섬에 가실래요?"라고 말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 옛날 그 남자처럼. 그와는 가지 못했던 약속의 땅, 섬에 이 낯선 남자와는 갈 수 있었다. 그 남자와는 섬보다 남자가 중요했지만 이 남자와는 남자보다 섬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누경, 그녀는 그런 여자였다.
이 남자도 누경에게 끌린 남자였다. 세상의 모든 남자를 가질 수 있어도 단 한 남자, 그토록 원하는 남자는 그녀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 점이 누경을 매마르게 만들고 있었다. 사막의 한가운데 던져놓고 기다리게 만드는 남자. 그래도 그에 대한 기다림은 멈출 수 없는 누경.
그런 누경을 두고 어떤 남자는 알 수 없는 감옥에 갇힌 포로라고 말했고, 실의에 빠진 채 취미도 없이 홀로 늙어갈 가여운 여자라고도 말했으며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다 살아버린 노파같이 이미 텅텅 비었다고도 하고,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구제 불능의 잠을 잘 여자라고 하거나 홀로 죽어서 고양이에게 먹힐 여자라고까지 악담을 늘어놓는 남자도 있었다.
두 남자, 기현과 강주...
그들 모두 누경을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녀의 심장에 새겨진 "얼룩"을 보지 못하는 남자들. 누경은 그런 남자들에게 관심없어 보였다. 그런데 한 남자가 계속 비집고 들어오려고 한다. 섬에 함께 다녀온 남자였다.
사랑과 결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날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비혼족인 친구 상미조차 인정해준 남자 기현. 처음부터 끌림이 있었다는 기현을 두고도 누경은 사막을 건널줄을 모른다. 그녀에게 강주는 기다림인 동시에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인 존재였다.
서강주. 엄마의 사촌의 아들인 남자. 누경이 열 여섯일때 결혼한 이 남자와 누경 사이를 정의할 단어가 사전 속에는 없다. 사랑이라고하기엔 모자라고 불륜이라고 하기엔 넘친다. 분명 누경에겐 사랑이지만 강주에겐 불륜인 관계. 그 어떤 교집합도 없는 관계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그는 약속을 한번도 지킨적이 없었다. 치마를 사주겠다는 약속도, 섬에 함께 가자는 약속도, 전화조차도 먼저 걸 수 없게 만드는 남자. 이 남자를 기다리면서 누경은 점점 사막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누경을 따라 걷는 걸음...
소설을 읽으면서 마치 누경의 그림자가 되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의 인생을 한 걸음 뒤에서 따라 걸으면서 때로는 그녀의 속이 되고, 때로는 그녀의 겉이 되면서 누경의 눈으로 기다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친구나 가족조차 이해못할 그녀의 행적들을 그림자이기에 함께 나누면서 걷는다. 읽었다기 보다는 걸었다는 표현이 맞을 전경린의 [풀밭 위의 식사].
누경을 따라 걷는 걸음은 언제나 일정하다. 한 걸음도 늦춰지거나 빨라짐이 없다. 항상 같은 속도다. 그래서 나는 누경이 더 안타깝다. 인생은 늘 같은 속도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