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가게 소정에 다녀와서... 쉼을 얻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의 향수 중에서 -

 

작년 이 맘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 불과 일년 전 일이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일상의 반복 속에서 조금은 지루해하며, 30대의 마지막을 우울하게 보냈다. 피아노를 치는 아들의 진로 문제, 사춘기로 인한 갈등과  타성에 젖어 버린 일이 주는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 거렸다.

아쉬움 속에 한 해를 보냈지만, 다시 선물처럼 1년의 시간은 나에게 왔다.

그리고 네 번의 계절 변화를 겪으며 2013년 12월 앞에 다시 서 있다.

이 한 해를 정리하며, 내가 겪은 일을 글로 쓰기 위해서는 좀 더 나를 성숙시키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꼭 글로 남겨보고 싶다는 마음도 든다.

파도가 아무리 거세게  몰아친다 해도 다시 잠잠해 지는 때가 오는 것처럼,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감정의 소용돌이 역시 시간과 일상에 묻혀 과거형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일요일 오후... 기말고사 공부를 하는 아들을 집에 두고, 오랫만에 남편과 근교로 외출을 했다.

정지용의 시 "향수"의 배경이 되며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는 옥천....

나는 시를 잘 알지 못하지만, 정지용과 백석 그리고 김수영과 기형도의 시를 사랑한다.

소박하고 아담하게 가꾼 정지용 생가는 이미 여러 번 다녀왔기에 간단히 둘러 본 후,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착한 식당으로 선정된 구읍할매묵집을 향했다.

 

 

 

겨울에는 메밀묵이 제 맛이라는 말에 메밀묵밥과 도토리묵밥을 시켰다.

도토리는 따끈한 육수를 부어 먹어야 하고, 메밀묵은 신김치와 듬성듬성 부숴 놓은 김,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살살 비벼 먹는게 더 맛난다고 한다. 함께 따라 오는 반찬 역시 깔끔하고 정갈한 맛이었다.

특히 총각 무우와 갓을 넣어 시원하게 담은 동치미와 시골 간장에 푹 삭힌 고추 절임이 개운하고 맛깔스러웠다. 그럴 듯한 외식이 어느 순간부터 싫어졌다. 슴슴하게 무쳐 낸 나물 반찬이나 소박한 찌개 한 그릇이면 족하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더 중요한데, 좋아하는 음식을 가족과 나눌 수 있으니 즐겁고 행복한 시간임에 틀림없다.

 

 

점심을 먹고,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홍차가게 소정에 다녀왔다.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에 위치한 홍차가게 소정... 입구의 빨간 간판이 매우 인상적이다.

멋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 부부가 추천하는 홍차 맛에 우리 부부는 완전 반해 버렸다.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 길가에 자리 잡은 '소정'은 대청호 끝자락과 나지막한 산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차 한잔을 마셔볼 수 있는 아담한 카페이다.

20여년 간 다양한 차를 공부하면서 홍차의 매력에 빠졌다는 주인 부부는 차와 문화를 즐기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이 곳을 열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해 추천해 주신 홍차와 아이리쉬 위스키 크림 바닐라라는 긴 이름의 홍차를 마셨다. 그리고 차와 함께 나오는 갓 구운 스콘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따끈하게 덥힌 찻잔에 향긋한 홍차와 스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책 한권...

무엇보다 이런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커다란 테라스로 옅은 햇빛은 비추고, 느긋하게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즐겼다. 색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올 해가 가기 전, 눈이 오는 어느 날... 꼭 한번 다시 오자는 기약없는 약속을 했다.

벚꽃이 만발한 봄, 녹음이 짙은 여름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산한 가을에도 어울리는 홍차가 준비된 곳이 홍차가게 소정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잠시 시간도 멈춰 버린 듯한 쉼과 여유가 있어 좋다.

지친 몸과 마음도 홍차와 함께 쉼을 얻은 듯...평화롭고 고요하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얻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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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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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메타포라고!"

"그게 뭐죠?"

시인은 마리오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예를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루다는 시계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좋아,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

"참 쉽군요. 비가 온다는 거잖아요."

"옳거니, 그게 메타포야"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28쪽에서 -

 

메타포가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작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작은 상자에 담겨져서 물에 떠 내려온 아기"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하는 것이다.

-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

 

칠레 남부의 작은 섬...이슬라 네그라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 하루를 의미없이 보내고 있는 청년 마리오 히메네스가 우연한 기회에 우편배달부가 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늘 같은 일상의 반복으로 삶이 무미건조했던 마리오에게 칠레의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편지를 배달하는 일이 훗날 그의  삶 전체를 바꿀만한 위대한 사건이었음으로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평면적으로 펼쳐놓고 보면, 무수히 많은 만남과 이별의 반복이다.

스쳐가는 의미없는 만남도 있지만,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만남과 이별도 존재한다.

 

호기심 많고 순수한 우편배달부 청년 마리오에게 메타포의 예를 드는 장면에서

나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렸다.

토마시와 테레자... 테레자를 작은 상자에 담겨져서 물에 떠 내려온 아기로 비유한 토마시...

메타포는 그렇게 그들 사랑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또한 마리오와 시인 네루다는 메타포를 통해 서로에 대한 우정을 조금씩 쌓아가기 시작한다.

 

 

마리오에게 메타포의 아름다운 세계를 열어준 네루다가 스승이자 친구였다면...

그의 가슴을 설레임과 떨림으로 이끈 것은 베아트리스라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사랑에 빠진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베아트리스에게 줄 시 한편을 써 달라고 부탁하고,

네루다는 결혼을 반대하는 베아트리스의 어머니를 설득해 주는 사랑의 메신저 역할까지 하게 된다.

 

"그가 말하기를..... 그가 말하기를 제 미소가 얼굴에 나비처럼 번진대요."

"그러고는?"

"그 말을 듣고 웃음이 났어요."

"그랬더니?"

"그랬더니 제 웃음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요. 제 웃음이 한 떨기 장미고 영글어 터진 창이고 부서지는 물이래요. 홀연 일어나는 은빛 파도라고도 그랬고요."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62쪽에서 -

 

베아트리스의 어머니는 마리오의 메타포를 사악한 마약으로 치부했지만, 사랑에 빠진 마리오와 베아트리스에게는 아름다운 사랑의 표현들일 뿐 이었다.

네루다와 만남은 마리오의 언어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만남은 세상과 사물을 보는 시각을 변화시켰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사랑에 빠진 자신의 마음을 메타포로 고백하며 시인의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천국으로 가는 열차는 완행이고, 축축하고 숨 막히는 역에서 지체하는 법이다. 오직 지옥행 열차만이 급행이다. 바로 그 지옥의 열기가 혈관을 따라 솟구쳤다.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79쪽에서 -

 

"시인 동무, 당신이 저를 이 소동에 빠뜨렸으니 책임지고 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제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예요!"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85쪽에서 -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손으로 직접 쓴 편지이다.

손으로 만든 선물은 그 사람의 체온이 담겨 있어 가장 정성스럽고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마음을 담아 쓴 편지만큼 나를 감동시키는 선물은 없었다.

그 편지에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구절이 인용되어 있다면... 아마 나는 그 편지를 보낸 사람을 열렬하게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나는 네루다의 시집 "질문의 책"을 갖고 있지만, 이 소설 속에는 주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에 담긴 시들이 인용되어 있다.

베아트리스의 어머니가 마리오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장면은 노골적이지만 유머러스했으며, 베아트리스와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의 비유적 묘사도 특별한 재미를 준다.

무엇보다도 잔잔하면서도 편안한 문장들... 그 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살바도로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에 당선되며 네루다는 파리 대사관으로 임명된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우편배달부였던 마리오와 그를 시의 세계로 이끌었던 네루다는 이별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프랑스에서 날아 온 한통의 편지와 소포 꾸러미

 

"유식한 척하는 양반, 유몰론자가 뭐요?"

코스메가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장미와 통탉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항상 통닭을 집는 사람이죠"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130쪽에서 -

 

마리오는 이제 더 이상 섬에서 시간을 죽이며 살아가는 꿈없는 백수 청년이 아닌 것이다.

모든 사물에 의미 부여를 하며 메타포를 만들어 가는 삶에서 몸과 마음으로 시를 쓰는 시인으로 바뀌었다.

 

 

외교관이 되어 프랑스로 간 네루다는 마리오와 친구들이 있는 작은 섬...이슬라 네그라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녹음기를 가지고 이슬라 네그라를 거닐면서 마주치는 모든 소리를 녹음해 줘.

우리집 유령이라도 필요해. 건강이 좋지 않다네. 바다가 아쉬워. 새들도 아쉽고. 우리 집 소리를 실어 보내주게. 정원에 들어가서 종을 울리게. 먼저 바람에 울리는 작은 종들의 가냘픈 소리를 녹음하게....그 다음에는 바윗가로 가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담아줘. 갈매기 소리가 들리면 녹음해 주고. 밤 하늘의 침묵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까지도. 파리는 아름답지. 하지만 내겐 너무 큰 옷이라네.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108쪽에서 -

 

마리오는 네루다를 위해 소리를 모으기 시작한다.

시와 바람소리, 큰 종을 울리는 소리, 갈매기 울음소리, 벌집 소리, 파도가 물러가는 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기의 탄생을 알리는 울음 소리를 녹음한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나는 우선 책장을 넘기는 바스락 소리, 공원으로 소풍 나온 아가들의 까르륵 거리는 웃음소리,사랑을 시작한 연인들의 순수한 속삭임 그리고 새벽의 적막함을 녹음하고 싶다.

그리고 자동차 소리, 핸드폰의 쉼없는 진동벨 소리, 미움과 갈등의 소리, 전자제품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소리는 제외하고 아날로그의 소리만 남기고 싶다.

 

 

병을 얻어 다시 이슬라 네그라로 돌아온 네루다는 이미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아옌다의 노력도 결국 쿠데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고 칠레는 사회적,정치적 혼란의 시대를 맞이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마지막으로 편지를 배달하려 하지만, 군인들의 통제로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전보의 내용을 모두 외워 버린다.

 

그리고 네루다와 마리오의 마지막 만남...

 

"무덤을 파는 건 좋은 직업이라네, 마리오. 철학을 배우니까."

 

그 검은 물이 지금 이 순간 시인에게 비밀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움과 무가 교차된 검은 물, 쿠데타 발발로 두 눈이 가려지고 손목마다 피를 흘리고 있을 시체들 아래도도 흐를 그 검은 물이 네루다의 입에서 시 한수가 흘러나오게 했다.

 

마리오는 네루다를 뒤에서 안고 신들린 눈동자를 손으로 덮어주면서 말했다.

"제발, 제발 죽지 마세요, 선생님."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중 158쪽에서 -

 

네루다는 마리오 곁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마리오는 새벽에 방문한 의문의 남자들과 함께 나간 후 행방 불명이 된다.

마지막 장면을 읽으며 여러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다 읽었다는 아쉬움과 허전함 그리고 오랫동안 잊지 못할 따뜻한 감동을 느꼈다.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인연들을 나는 만날 수 있을까 ?

이들처럼 조건없는 사랑과 우정이 정말 존재할까 ?

오랫만에 재미와 감동을 다 주는 책을 만나 기쁘고 반갑다. 하지만 흐뭇함과 함께 느껴지는 애잔함은 아마도 마지막 죽음 장면 때문인 것 같다.

작품 곳곳에 묻어있는 아름다운 시적 표현들과 마리오의 정신적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은 이 작품이 주는 큰 즐거움이었다.

 

저급한 언어들이 난무하는 요즘... 아름다운 삶의 메타포를 담은 말을 나는 만들어 낼 수 있을까 ?

오늘 내가 나누었던 많은 말들을 떠올려 보니 직설적이고 단순한 말들의 홍수였다.

문학에서도 빠르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 시대를 살면서 은은한 비유가 있는 말과 글이 너무 그립다. 이 책은 소설인데...난 갑자기 시가 너무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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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02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정성을 들인 페이퍼군요. 인용문에 멋진 배경에..... 착한시경님의 정성이 더 감동적입니다.
이 소설 참 재미있죠 ? 묘하게 잔잔하고 말이죠... 미겔 스트리트'라는 소설도 이런 풍은 아니지만 이국적 정서가 있어서 영미소설과는 다른 맛을 줍니다. 사진 보니 벌써 크리스마스가 온 것 같아요...

착한시경 2013-12-02 09:57   좋아요 0 | URL
동네 카페랍니다^^ 주로 오전에 책읽으려고 가는 곳인데~커피가 맛있어요~과분한 칭찬과 관심 감사~감사드려요...저두 곰곰님 글 언제나 반갑게 읽고 있어여~

영롱한눈물 2014-01-12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뉴스메일 타고 우연히 오게 됐는데 푹 빠져서 읽어 내려갔네요. 님 덕분에 읽을 책이 또 한 권 늘었네요~ 고맙습니다^^

남충우 2015-09-15 0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을 보고 내용을 다시 한 번 이해합니다.

스카르메타가 표현하고자 한 네루다의 친근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이런 비슷한 시건들이 많았겠죠

가벼움과 진중함이 잘 조화가 된 것 같습니다.

암울한 내용도 재미있게 얘기하네요



 

 

 

 

 

 

 

 

 

 

 

 

 

 

 

 

하룻 동안 내린 눈이 아파트 뒤...계족산을 하얗게 덮었다. 오후의 옅은 햇살은 도로 위의 눈을 녹게 했지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섭기만 하다.

늦가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는 눈이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가을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과 속절없이 보낸 시간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 다짐했던 수많은 계획과 각오들....

특히 100권의 책을 읽겠다는 무모한 계획은 정말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마흔이라는 생의 전환점에서 100권의 책을 한꺼번에 구입하는 대책없는(?) 일을 저질렀고, 그 무모함 속에는 책 속에서 길을 찾아 보리라... 그래서 후회없는 40대를 보내리라는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올해 가장 많은 책을 구입했고, 가장 적게 읽었다.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을까 ?

밀린 숙제 앞에서 시계를 보며 쩔쩔매는 아이처럼 마음이 조급해 진다.

수전 손택의 일기는 25살에 머물러 있고, 읽고 싶은 마음에 미리 다 구입해 버린 파스칼 키냐르의 책은 책상에 쌓여있다. 이런 중에 나는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을 뒤적이던 중 갑자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내 손에 있는 책은 시집 두 권이다.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마음은 생기 넘치는 은방울꽃들로 가득 차 있다.

저녁이 나의 길 위해서

푸른 촛불처럼 별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

무성한 숲 속에서 노래하는 것이 바람인지 수탉인지 ?

어쩌면 들판 위에 겨울 대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는 것이리라.

 

아름답다 너, 오 흰 설원이여 !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오, 숲의 울창한 아련함이여 !

오, 눈 덮인 밭의 활기참이여 !

못 견디게 두 손을 모으고 싶다.

버드나무의 허벅지 위에서.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의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

 

랭보와 견주어지는 천재 시인 예세닌... 미국 여자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과의 사랑, 결혼 그리고 이어지는 이혼으로 결국 자살을 선택하며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안녕, 나의 친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다정한 친구, 그대는 내 가슴 속에 살고 있네.

우리의 예정된 이별은

이 다음의 만남을 약속해 주는 거지.

 

안녕, 나의 친구, 악수도 하지 말고,

작별의 말도 하지 말자.

슬퍼할 것도, 눈썹을 찌푸릴 것도 없어

삶에서 죽음은 새로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삶 또한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지.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의  이별의 시 -

 

잉크가 없어 칼로 자신의 팔목을 그어 피로 쓴 마지막 시....

두서없이 읽다가 발견한 시 한편에 눈길이 갔다. 사실 시인보다는 시인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던 연상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의 이야기가 먼저 눈에 띄였다.

자동차 뒷 바퀴에 스카프가 걸리면서 목 골절로 죽음을 당한 비운의 무용수 던컨과 불같은 사랑에빠졌던 젊은 시인 예세닌... 그가 남긴 아름다운 시들 속에서 자연에 대한 경외, 사물에 대한 깊은애정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오래 전... 첫 눈을 간절히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눈이 오면 만나자는 유치한 약속을 하기도 했고... 우연히 첫 눈을 함께 보게 되는 날이면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기도 했다.

늙는다는 건... 경험해야 하는 것보다 기억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는 날... 나는 혼자 커피를 마셨고, 하릴없이 많은 책들을 뒤적였다.

 

 

이 해가 가기 전... 수전손택의 책을 마무리 해야 하고, 은밀한 생을 통해서 키냐르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지금은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를 읽다가 잠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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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1-29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상당히 재미있어요.

착한시경 2013-11-29 19:46   좋아요 0 | URL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있어요^^ 즐거운 금요일 밤 되세요~
 

 

 

 

라온제나는 오래 전에 읽었던 공지희 장편동화 "영모가 사라졌다"에 나오는 판타지의 세계이다.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아버지를 피해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영모,

영모가 친구 병구 그리고 고양이 담이와 함께 간 곳이 라온제나이다.

순 우리말로 "즐거운 나"라는 뜻을 가진 라온제나...

라온제나, 라온제나... 입안에 맴도는 이 말이 너무 좋아 알라딘 내 서재의 이름이 되었다.

즐거운 나로 가는 길... 

이미 첫눈이 내렸고, 스산한 바람과 쉽게 어두워지는 저녁 하늘은 겨울이 눈앞에 성큼 다가와 있음을 알리는 증거이다.

 

주말을 함께 보낸 가족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 간 월요일 아침...

나는 즐거운 나를 찾기 위한 길을 나선다.

새벽부터 내린 비에 낙엽은 젖어 길가에 쌓여있고, 출근 시간이 지난 도로는 한산하다.

여름 내내 푸르름을 자랑하던 가로수의 무성한 잎도, 나란히 우산을 쓰고 그 길을 걸어 학교로 향하던 아이들도,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등산을 하는 초로의 노인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흩어지는 비가 내려 창문마저 열어 놓을 수 없는 버스 안은 비릿한 냄새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의 세계에 빠져 있다.

                                             

  

 

 

 

 

 

 

 

 

 

 

 

 

 

                                                                

314번 버스를 타고 가는 30분...

가방 속에는 두 권의 책이 들어 있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반복해서 들려온다.

밀린 숙제처럼 내 맘을 무겁게 하는 수전손택의 "다시 태어나다"와 가볍게 읽기 위해 넣어 가지고 다니는 송정림의 "내 인생의 화양연화"

버스 안에서 읽기에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폈다.

물론 좀 더 조용하게 생각할 수 있는 장소였더라면 수전손택의 책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가겠다는 마음은 이성적 의지일뿐 나는 버스 안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깥 풍경을 보는데 쓰고 말았다.

우울한 날씨는 사람의 마음마저도 서글프고 아련하게 만들어 버린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혹은 세 번정도 시내 서점을 찾아간다.

즐겁고 기쁜일을 기념하기 위해 책을 사고, 속상하고 슬플 때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책을 산다.

서점에 있는 책들의 표지를 구경하고, 마음에 드는 책을 훒어보다가 못내 좋으면 집으로 가져온다. 최근에는 서점에 더 자주 가는 편인데 마음이 심란하고 울적할 때 찾아가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진다. 그리고 내가 갖고 싶은 책을 찾았을 때는 고민마저도 잊고 흥분한 마음이 된다.

늘 같은 자리에서 말없이 나를 위로해주는 책들...

그들의 너그러움과 아름다움 앞에 나는  겸손해진다.

 

특히, 내가 알라딘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마중하는 작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빈집 중에서) ... 내가 사랑하는 시인 기형도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풀 중에서)... 시인 김수영 그리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와 칼의 노래 김훈이 보인다.

선한 미소를 가진 이해인과 박완서 그리고 박경리가 그곳에 있다.

 

 

 

월요일 오전... 알라딘에는 클래식이 흐르고, 수많은 사연을 담고 그 자리에 머무는 헌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따스한 사람들의 사연을 담은 헌 책들... 이미 누군가의 손길이 지나간 책장을 넘기며 이 책의 주인을 상상해 본다. 서가에 빼곡하게 꽂힌 책들 중에 특히 나를 사로잡은 몇 권의 책...

문학동네와 열린 책들 그리고 시공사에서 나오는 세계 문학을 모으는 중인데 오늘은 열린 책들과 시공사 책이 새로 나와 기쁜 마음으로 구입했다. 그리고 서가 한 켠에서 리스본행 야간열차와 파스칼 키냐르의 책을 발견했다.

 

모든 책들에는 작가의 사연도 담겨져 있지만, 그 책을 구입한 사람들의 사연도 함께 쌓여 가는 것

같다. 욕심대로 7권의 책을 모두 구입해 돌아오는 길.... 여전히 날씨는 흐리고 추웠지만 책이 주는 깊은 위로에 감사하며 돌아왔다.

 

그리고 오후 일상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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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1-27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착한 시경님, 저랑 같은 동네 사시는군요. 글만 읽어오다가 반가와서 오늘은 댓글도 한줄 남겨봅니다 ^^

착한시경 2013-11-27 08:20   좋아요 0 | URL
와~ 정말 신기하네요^^ 선비마을 사시나요? 가까운 곳에 이렇게 반가운 분이 사신다니... 서로 얼굴은 모르지만 동네에서 마주쳤을 수 있겠네요~ 비 오는 아침 반가운 댓글 감사해요~

그렇게혜윰 2014-03-04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동화 읽은 후로 라온제나를 좋아해요. 서재 들를 때마다 혹시....했는데 역시!였네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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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의 우연이 만들어낸 테레자와 토마시의 만남...줄리엣 비노쉬와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 소설인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난 테레자와 토마시의 삶과 사랑에만 촛점을 맞춰 읽었고, 영화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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